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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니북스
오랜만에 가슴이 젖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었습니다. 현대시도 아닌 옛 한시가 이리 가슴에 와 닿을지 몰랐습니다.

시집을 읽고 나면 그 느낌을 표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마치 그 느낌조차 시로 표현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김용택 시인이 직접 엮고 시인의 느낌과 해설이 곁들여진 이 책보다 더 좋은 한시(漢詩) 번역본을 만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시가 이렇게 정겨울 줄이야, 이럴 때면 늘 책을 쓴 이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 책을 사 놓은 지도 꽤 됐습니다. 올 초에 샀는지, 작년 말에 샀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괜찮을 것 같아 집어 들었는데, 한시라는 표제 때문에 늘 읽기를 주저했던 것입니다. 요즘 경제 경영서를 읽고 있어 출근길에 머리도 식힐 겸 별 생각 없이 그냥 집어 들고 나갔는데 웬걸, 오랜만에 가슴 속에 묻어둔 감정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시라는 게, 아니 이 책에 소개된 것만 그러한지는 몰라도, 단아하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비 그친 후의 맑은 느낌처럼 생각이 맑아지고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가슴이 촉촉해집니다. 이런 기분 오랜만에 느껴, 동어반복인 줄 알지만 되풀이해서 말하게 됩니다.

출근길에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은 퇴근길에 마저 읽었습니다. 저는 왕십리에서 전철을 갈아 탑니다. 왕십리의 국철은 일반전철보다 운행 간격이 더딘 편입니다. 전철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책을 읽기에 딱 좋습니다. 아침에 <사랑>편을 읽고 저녁에 <자연>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가 나옵니다.

강에 뜬 달을 지팡이로 툭 치니 / 胡孫投江月
물결 따라 달 그림자 조각조각 흩어지네 / 波動影凌亂
오호라, 달이 다 부서져 버렸나? / 飜疑月破碎
(후략)


강에 뜬 달을 툭 치다니? 하!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억지 수사(修辭)가 아니라, 시인의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옵니다. 강희맹의 시입니다. 절묘한 표현에 감탄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 보름을 갓 지난달이 여전히 둥급디다. 달과 별이 가득 차있던 어린 시절 하늘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별이 사라져버린 서울 하늘이 새삼 측은해 보입니다. 달마저 없었다면 아마 저기가 하늘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옛 한시를 보며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건 마음속에 사라진 별을 다시 만난 때문이 아닐까요.

이처럼 자연을 노래한 시도 절창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에서는 사랑시가 단연 압권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다시 보니 그 느낌이 사뭇 다른 황진이 시 한 편 옮깁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 截取冬之夜半强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春風被裏屈幡藏
사랑하는 님 오시는 밤 / 有燈無月郞來夕
굽이굽이 펴리라 / 曲曲鋪舒寸寸長


황진이 이후 사랑시는 없다고 한 김용택 시인의 말이 와 닿습니다. 홀로 지내는 겨울의 긴 밤을 잘라내어 간직해두었다가 님과 함께 지내는 밤에 이어 붙여 길게 보내겠다고 합니다. 이런 황진이를 두고 꿈쩍 안 한 서경덕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일천 리 흐르는 강물 / 江水一千里
집에서 온 편지 열다섯 줄 / 家書十五行
별다른 말은 없고 / 行行無別語
일찍 돌아오라는 당부뿐이네 / 只道早還鄕


황진이와 이매창의 가슴을 뒤흔드는 사랑 노래도 노래지만, 전 위 시가 사랑시의 결정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 얼마나 할 말이 많았으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냥 일찍 돌아오라고만 했을까, 그 마음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원개의 시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한시 하나하나 마다 딸린 김용택 시인의 해설이 곧 시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이규보의 <어느 여름날>이라는 시입니다.

바름 부는 작은 대자리 가벼운 적삼 차림으로 누웠네 / 輕衫小(점)臥風(령)
두어 번 꾀꼬리 우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나네 / 夢斷啼鶯三兩聲
빽빽한 잎 사이에 숨은 꽃은 봄 지나도 피어 있고 / 密葉(예)花春後在
엷은 구름 사이로 나오는 햇빛은 빗속에서도 밝구나 / 薄雲漏日雨中明


김용택 시인의 느낌이자 해설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다 지나간 후에
나는 한발 늦게
피는
꽃이고 싶습니다.
가을꽃들이
피었다가 다 진 후에
네 눈에 드는
꽃이고 싶습니다.


위 한시의 느낌을 어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책을 덮으니 마치 두 권의 시집을 읽은 느낌입니다.

김용택의 한시 산책 1

김용택 엮음, 화니북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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