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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그 후 10년’이라는 주제로 열린 2005년 공개 심포지엄에서 WTO가 추구하는 ‘자유’무역이란 실상 미국과 유럽의 독점 사기극일 뿐이라는 것이 탄로 났다. 원래 이 공개 심포지엄은 지난 10년간 WTO가 ‘공정한 규칙’에 따라 자유무역을 촉진시키는 것을 선전하며, 시민사회와 그 과정에서 벌어진 ‘오해’를 풀고, ‘사소한 실수들’의 해결책을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지구 곳곳에서 온 전문가, 농부,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하나 같이 WTO가 사실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과 초국적 자본으로 권력과 자본만 더 집중시키며 무역불균형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라고 고발하였다. WTO에 대해 비판적인 시민사회에 대한 ‘다자주의냐, 정글의 법칙이냐’는 협박에 대해 참석자들은 ‘WTO가 이미 정글이며, WTO의 법칙이 이미 정글의 법칙이다’고 맞받아쳤다.

프랑스의 시민사회단체인 연대운동Movement Solidarite의 자끄 베르떼로는 지난 21일 오후 발표에서 미국과 유럽의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지난 10년간 협상과정에서 어떤 사기를 쳤고 WTO는 어떻게 직무유기를 하며 여기에 협조하였는지를 통렬하게 고발하였다. 그에 따르면 WTO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이 자신들이 이행해야 하는 의무에 대한 통보의 진실성에 대해 전혀 검사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 선진국의 농업정책이 WTO의 농업협상 규칙들과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도 결코 감시하지 않았다. 일례로 미국은 관개용수에 대한 정부보조가 3억에서 3억 8천만 달러라고 통보하였지만 사실은 100억달러가 넘는다. 농업용 석유에 대한 세금 환불의 경우 미국은 23억 달러가 된다고 OECD에는 알렸지만 WTO에는 통보조차 하지 않았고, 유럽연합의 경우에는 아예 이 부분을 자신의 '허용대상Green Box'에조차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만 하더라도 2000년 한 해 동안만 9억 8400만 유로의 세금환불 혜택을 실시하였다. 농산물에 대한 협정에서 개발도상국에게만 허용된 농업 부분에 대한 투자 지원의 경우에도 유럽은 은근슬쩍 부당하게 허용대상 안에 넣어서 WTO에 통고하였다.

개발도상국의 농업을 초토화하고 소농들을 파산으로 몰아가고 있는 ‘덤핑’ 농산물에 대한 수출보조금의 경우는 더 교활하고 악랄하다. 유럽연합의 경우 지난 10년간 수출보조금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자신들이 더 공정한 무역 당사자들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시리얼의 경우 수출보조금을 20배 가량 감축하였다고 선전하지만, 그동안 시리얼에 대한 직접 지불은 10배 이상 늘었으며, 수출량은 반으로 줄었다.

결국 수출되는 시리얼의 톤당 보조는 오히려 20% 가량 늘어난 것으로 계산된다. 개발도상국들을 속이며 시장을 개방하도록 하면서 자신들은 복잡한 공식을 통하여 이리저리 미꾸라지처럼 다 빠져나간 것이다. 이밖에도 감축보조대상 총량(AMS), 최소 허용보조(De-minimis) 등등에서 미국과 유럽이 친 지능적 사기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런 교활한 사기에 대한 WTO의 답변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자끄에 따르면 이 문제를 WTO에 물었을 때 분쟁조정을 담당하고 있는 가브리엘 마르쏘의 답변은 ‘WTO는 이런 통보를 단속할 기술도 자원도 없다. 진실성의 문제는 전적으로 각 회원국들에게 달려있다. 모든 회원국들이 시스템의 경비견으로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WTO는 선진국들에 대한 치밀한 사기극에 대해서는 대응할 의사도 능력도 없으며, 이것은 전적으로 각 회원국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개도국에 한해 관세감축 신축성을 부여할 수 있는 '특별품목(Special Product)' 제도를 지나치게 기대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이어졌다. 또 하나의 사기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이나 유럽이 주도하고 있는 IMF와 세계은행에서는 지속적이고 일관적으로 특별품목에 대한 예외에 반대하고 있기에 ‘한 입에 하는 두 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개발도상국의 경우 농산물에 대한 관세가 이미 자국의 농산물을 보호하기에는 턱없이 낮은 형편인데 관세를 낮추는 것을 조금 더 유예하거나 덜 낮춘다고 해서 볼 혜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농산물을 수출하는 아르헨티나와 같은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같은 개발도상국이면서도 이 특별품목 규정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개발과 연대를 위한 국제 협력CIDSE’에서는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던져준 자그마한 미끼인 특별보호조치Special and Differentiated Treatment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 특별보호조치가 ‘지속가능한 조치Sustainable Treatment’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큰 공감을 얻었다.

제3세계 네트워크의 마틴 콜은 이런 수많은 사기가 설혹 사기가 아니라 진정한 약속이라고 하더라도 개도국이 농산물 협상에서 선진국으로부터 얻는 것보다 공업이나 서비스 협상에서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점을 특별하게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농산물 협상에서 선진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수출보조금을 철폐하는 등의 내용은 개발도상국들이 공업과 서비스 부분에서 이미 개방하고 또 요구받고 있는 내용과 비교해보면 50년은 더 뒤떨어진 내용이라는 것이다.

다른 참석자들 역시 서비스GATS와 비농업부분에서의 무역협상NAMA에서 개발도상국이 어떻게 수탈당하고 있으며, 그 수탈이 더 강화될 것인가를 증언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지적재산권과 기술이전의 문제이다. 선진국은 지적재산권을 더 강화함으로써 개발도상국에서 부가가치산업이 일어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기술과 정보, 지식의 빈익빈부익부를 더욱 가속하고, 세계 공업의 하청구조를 영원히 고착시키고 말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지적재산에 대한 보호조치가 없는 개발도상국에서 유전자, 종자, 전통 약품 등의 전통 지식 등을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의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는 쪽으로 협상을 진행시킬 것이 아니라, 자국의 농산물과 공업을 육성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방향에서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컨대 무역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식량 주권과 에너지 주권 등을 지키며 국내의 소농과 공업을 보호하여 고용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발전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서 국제적인 시민단체들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한국의 농민운동단체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듯이 이번 심포지움에 참석하고 발제를 한 소위 전문가 시민 단체들 역시 대부분 개발의 문제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대립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WTO가 국가간 기구라는 점에서 볼 때 전략적으로 개발도상국을 통하여 협상과정에 영향을 발휘함으로써 소농과 노동자 등의 이익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다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무역의 자유화를 통한 이익과 피해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란 국가간 게임의 문제로 전환함으로써 초국적 자본과 대규모농장주라는 수혜자와 국적과는 상관없이 소농과 가족농이라는 피해자는 뒤에 은폐되어 버리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요컨대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수혜자이고, 개발도상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피해자인 것처럼 엉뚱하게 해석이 되어 ‘선진국’인 한국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이기주의적’인 것으로 이해되거나 아예 무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심포지엄에서 일본의 농민단체가 개방에 따른 일본 농민들의 어려움을 호소하였을 때 돌아온 것은 참석자들의 싸늘한 반응이었다. 일본 단체의 주장은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에 대한 강조와 아시아에서 쌀농사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 그리고 일본의 지리적 특징에서 나타나는 농업 규모화의 어려움, 미국과 유럽과는 달리 일본의 농업은 전혀 수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 등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WTO에 파견된 호주 대사는 인종주의적 태도에 가까울 정도로 무례하게 응수하였고, 다른 참석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한국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경해 열사의 희생 이후 WTO에 반대하는 한국의 농민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존경이 보내지고 있지만 한국 농민들의 목소리 자체가 존중받는지 의문이다.

실제로 지난 2월 말 홍콩에서 있었던 WTO반대를 위한 국제협력회의에서 필리핀의 저명한 좌파 조사연구단체인 이본Ibon의 활동가 중 한 사람인 토니는 전체 회의에서는 이경해 열사의 이름을 거론하며 싸움을 독려하였지만, 농업협상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를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한국의 농민들이 국내보조금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친WTO'라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국내보조금을 철폐함으로써 필리핀의 소농이나 가족농들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한다. 토니 역시 오히려 필리핀의 대농들만 이익을 봄으로써 필리핀 내에서의 플랜테이션화를 더 가속시켜 역설적으로 소농과 가족농들은 토지를 잃고 농업노동자로 전락하여 더 비참한 상태로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제3세계 출신 활동가가 빠지기 쉬운 현실 국제정치의 함정인 '국익'이라는 맹목적 '애국주의'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오류에 빠져, 생각지도 못하게 대농들의 이해를 역설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농민운동이 넘어야할 현실적 장벽이다. 자칫하면 '싸움의 명성'이라는 헛된 이름만 높아지는 속에서 실제 요구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도 못 얻는 수가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아프리카 농민의 어려움과 비교하여 문제도 되지 않는 한국 농민의 어려움 정도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 밖에 없어 보인다.

WTO 각료회담이 열리기 전 국가주의의 장벽을 넘어 일관되게 소농과 가족농의 입장에서 아시아의 다른 소농조직과 튼튼히 연대를 구축하는 길뿐이다. 그래서 한국의 농민운동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농업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구적으로 소농과 가족농들의 삶을 보편적으로 옹호하고, 일관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한국 농민들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볼 때도 중요하다. 요컨대 우리에 대해서 구차하게 말하지 않고도 보다 더 극적으로 말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못 사는 나라가 WTO에 들어가기

WTO에 가입하려는 소국가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뉴질랜드 오크랜드 대학 법과대 교수 제인 켈시의 이야기는 기가 막힌다. 먼저 WTO에 가입하려고 하면 가입 의사를 밝힌 나라와의 무역 협정에 관심이 있는 나라들이 실무당사자Working Party라는 것을 형성한다.

가입을 원하는 나라는 먼저 이 실무당사자 그룹의 요구조건을 먼저 충족시켜야 하며, 이 요구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가입 자체가 봉쇄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이 실무당사자 그룹들이 가입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내용은 WTO에 규정되어 있는 것보다 더한 것들을 요구하며 당사자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나라들과 협상하여 일일이 다 타결을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를테면 태평양 섬나라의 경우에는 미국과는 영화와 공중파 등 서비스 산업을 개방하는 것을, EU와는 섬에 대한 소유권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것을 협상해야 한다. 이 섬나라들은 이미 호주와 뉴질랜드로부터 다른 나라와 WTO에 상당하는 협정을 체결할 시에는 자동적으로 호주와 뉴질랜드와도 동등한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강요받았다.

그런데 이 실무당사자 그룹이란 WTO의 규정에 공식화되어 있지만, 이 실무당사자 그룹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규정이 없다.

이런 점을 보면 가입 절차가 완전히 폭력조직에 가입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셈이다. 때문에 이 실무당사자그룹과의 협상이 WTO보다 더한 WTO라고 불린다고 한다. / 엄기호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우리나 일본과 같은 G10 소속인 스위스와 노르웨이에서 온 농민과 활동가는 자유무역이나 선진국의 농산물 시장 개방이 개발도상국의 소농과 가족농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그것이 선진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펼침으로써, 내용에서 있어서는 일본 농민단체와 다를 바가 거의 없었지만 참석자들로부터 완전히 다른 반응을 받아냈다. 물론 인종주의적 편견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지만 한국의 농민운동이 무엇을 지향해야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22일 심포지엄 마지막 날 대만 방송국의 기자가 쫓아와서 농민연대의 대표이기도 한 가톨릭농민회의 정재돈 의장을 인터뷰하며 ‘한국의 농민운동에 큰 감명을 받아 인터뷰를 하기 위해 하루 종일 찾았다’며 카메라를 들었다. 국제가톨릭청년농민운동은 이번 홍콩 각료급회담에 대한 싸움을 전적으로 한국가톨릭농민회에 기대하고 있다. 저명한 반세계화운동단체인 남반부초점의 활동가도 홍콩 각료급회담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 농민운동의 계획을 듣고자 만남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미국과 유럽, 나아가 초국적농업자본과 대규모농장주들의 거대 사기극에 맞서기 위한 지구적인 소농과 가족농의 투쟁이 한국의 농민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농민운동이 소농과 가족농의 생존의 문제를 ‘국익’으로 왜곡하고 있는 ‘사이비’들을 넘어 더 주도적으로 연대하고 답변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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