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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에서는 저희 학교 라오스 해외자원봉사단 3기(이하 봉사단)가 우돔싸이 고산족 마을에서 학교를 건축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학교 건축에는 남자 봉사단원들이 많은 고생을 했던 반면, 저를 포함한 4명의 여자 봉사단원은 학교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그곳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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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 가이드였던 비엔캄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이 고산족 아이들은 유치원이 없이 대게 6살경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우리 나라처럼 연령별로 학년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초·중·고등학교의 개념이 없이 단순히 저학년·고학년으로 분류되는데, 그 분류의 연령도 굉장히 모호하다고 하더군요. 이곳 고산족에는 현재 5학년까지의 학제가 있다고 합니다.

저학년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는 복장이 자유로웠던 반면,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마치 교복이 있는 듯 보였습니다. 남자 아이들의 경우에는 흰색 남방에 검은색 바지, 여자 아이들은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이나 파란색 긴 치마를 입고 있었거든요. 간혹 목에 빨간색 스카프를 두른 아이들도 있었으나 일반적이지는 않았습니다(참고로 라오스는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고학년 아이들에게는 교복이 있느냐"는 제 질문에 비엔캄씨는 "교복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고, 단지 일반적으로 그렇게 입을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거의 바지를 입지 않고 긴 치마를 입는다고 합니다.

평균적으로 10명의 아이 낳아 6명 잃어

어린 아이가 동생을 업어서 돌보고 있다.
어린 아이가 동생을 업어서 돌보고 있다. ⓒ 이정은
비엔캄씨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이곳의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15살경부터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만큼 빨리 결혼을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인지 저희 봉사단원들이 아이들에게 나이를 알려 주었을 때 아이들이 왜 그렇게 놀랐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고산족 여자들은 평생 동안 평균적으로 10명의 아이를 낳는데 그 중 6명 정도의 아이를 풍토병 등의 다양한 이유로 잃는다고 하더군요.

다시 학교 얘기로 돌아가자면, 일반적으로 9시경에 수업이 시작되면 학교 운동장에는 6살 미만의 미취학 아이들만이 남게 됩니다. 저희 여자 봉사단원들은 주로 이 아이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요. 자신들과 다른 세상에서 온 저희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한지 이 아이들은 저희들 주변에서 그 크고 맑은 눈으로 말똥말똥 우리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기만 했답니다.

이곳 아이들은 어찌나 수줍음이 많은지 저희가 손을 잡고 싶거나 함께 놀이를 하고 싶어서 곁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가기에 바쁩니다. 이름을 물어봐도 수줍게 웃기만 하고, 몇 번의 거듭된 저희의 질문 끝에 간신히 이름을 말할 때면 너무도 작은 목소리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대답합니다. 저희 봉사단원 주변에 모여서 저희를 바라보면서도 막상 적극적으로 저희에게 다가서기를 수줍어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더욱더 순수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고무줄 놀이, 구슬치기 등 우리와 비슷한 놀이 문화

아이들의 놀이문화는 우리 어릴 적 놀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반갑고 친근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대개 고무줄 놀이를, 남자 아이들은 구슬치기를 하거나 나무 잎사귀로 만든 우리 나라의 제기처럼 생긴 물건을 손으로 치며 놀기도 했고요.

고산족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다.
고산족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다. ⓒ 이정은
다른 세상 속에 살면서 비슷한 놀이를 하며 자라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 비록 요즘 한국의 아이들은 이런 놀이보다 컴퓨터 게임에 더 열광하지만, 저 역시 고산족 아이들이 즐기는 이 놀이들을 즐기며 자랐기에 잊고 지냈던 동심을 다시 되찾은 듯했습니다. 하여 제 현실적인 고민들은 잠시 잊은 채, 아이처럼 마냥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현장에 간 지 3일째 되는 날부터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슬슬 저희들에게 익숙해 졌는지 함께 놀이를 하자며 저희에게 자신들의 놀이를 알려주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이 순간 저희들은 어찌나 뛸 듯이 기뻤는지요. 저희들이 다가가기만 해도 웃으며 도망가기만 하던 그 수줍던 아이들이 먼저 함께 놀자며 다가오던 때의 그 기쁨. ‘이러다가 아이들과 제대로 한 번 놀아보지도 못하고 떠나는 건 아닐까?’ 조바심내고 걱정하던 제 마음의 먹구름이 한꺼번에 걷히는 순간이었습니다.

남자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는 모습.
남자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는 모습. ⓒ 이정은
하지만 더욱 저희를 놀라게 했던건 그 아이들이 저희들에게 알려준 놀이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가르쳐 준 놀이가 무엇이었냐구요? 바로 ‘수건돌리기’와 ‘고양이와 쥐’ 놀이였습니다. 고산족 아이들은 수건 대신에 돌멩이를 사용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지, 놀이 방식은 똑같았어요. 아이들과 만난 지 3일만에 진정으로 하나가 된 듯 한 느낌이었습니다.

페이스 페인팅과 마술풍선…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저희 봉사단원들은 라오스로 떠나기 전, 아이들과 함께 할 프로그램으로 율동과 페이스 페인팅, 마술풍선 등을 준비했었습니다. 물론 준비했던 모든 프로그램들을 아이들에게 해 주긴 했지만,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결국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저희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부터 우리가 문명적으로 ‘위’에 있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아래’로 내려다 보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페이스 페인팅이나 마술풍선 등은 그 아이들에게는 처음보는 낯선 물건들이었을 테니까요. 아이들에게 이런 것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즐겁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 프로그램들을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아이들도 저희도 모두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즐거웠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좋아하는 아이들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좋아하는 아이들 ⓒ 이정은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4일이라는 시간 동안 저희는 준비한 프로그램 이외에도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계속 알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알려주면서 아이들과 친해져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공기놀이’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의 놀이를 알려주며 아이들과 함께 하면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러나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그런 놀이들을 알려주기란 쉽지 않았고, 게다가 수줍음이 많은 그 아이들을 함께 놀이에 이끌어 내기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왜 저희는 그 아이들의 놀이를 배우면서 우리가 고산족 아이들의 놀이문화에 동화되어야 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3일째 되는 날 아이들의 놀이를 함께 배우면서 그제서야 비로소 저는 아이들을 대하는데 있어서의 저의 미숙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늦은 깨달음이었죠.

잘못된 출발 전 마음가짐 … 아이들이 나를 변화시켜

비록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이 곳 아이들과의 생활 속에서 저는 너무나도 많은 삶의 재산을 얻었습니다. 처음 라오스로 떠날 때, 솔직히 저는 이곳 아이들이 굉장히 불쌍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잘 먹지도, 입지도, 배우지도 못하는 이곳 아이들이 우리를 부러워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첫 날, 저는 그런 저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단지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의 눈으로 저희들을 바라볼 뿐이었지, 그 아이들의 눈망울에서는 저희들에 대한 동경이나 부러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문화 상대주의’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어떤 문화건 간에 모든 문화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하지, 일관된 하나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론상으로만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깨달았고, 저는 이번 우돔싸이 고산족 아이들의 생활을 보며 그 이론을 절실히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아이들과 헤어지던 나흘째 되던 날,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앞에 두고 중얼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들은 ‘이 언니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거지?’ 이런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며 마냥 웃고 있었지요. 저는 ‘앞으로 이 아이들에게 내가 과연 어떤 존재로 남을까?’ 라는 생각에 차마 아이들을 등지고 돌아설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와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저 역시 아직까지도 저의 질문에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가 그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로 남길 바랬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 아이들에게서 오히려 제가 잊혀지기를 바랬던 것일까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가 그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로 남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오히려 제 자신을 변화시키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모두를 같은 눈높이에서 사랑하고 대하며 그들의 삶의 방식에 나를 물들이는 것. 이것이 라오스 고산족 아이들이 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정은 기자는 지난 1월 9일부터 20일까지 라오스 봉사활동 및 관광을 다녀왔습니다. 이 내용은 봉사활동을 기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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