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 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립니다. 장마철에는 그다지 비가 많이 오지 않았는데 장마가 끝나고 나니 오히려 더 자주 비가 옵니다. 지난주에는 일주일동안 단 하루만 빼놓고 6일 동안 비가 왔습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비가 온다는 것도 올해의 특징입니다. 이번 주말에도 비가 내린다고 하는군요.

비가 오면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이 있지만 특히 농작물에는 큰 피해가 우려됩니다. '처서에 비가 오면 곡식에 독이 들어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조량이 풍부해 알차게 곡식이 여물어 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비가 오면 그만큼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는 말이지요. 올해는 8월 23일이 처서였는데, 이날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제 고향은 충북 음성군입니다. 인삼, 고추, 담배로 유명한 고장이지요. '생거진천'이라는 말 아시죠? 진천이 가장 살기 좋다는 뜻입니다. 음성 바로 옆이 진천입니다. 이천쌀이 유명하면, 여주쌀이 유명하듯이 진천이 살기 좋으니 음성도 당연히 살기 좋지요.

주말이면 거의 빠짐없이 시골 고향에 내려갑니다. 이른 봄부터 시작해 추수가 끝나는 늦가을까지 한달에 두, 세번씩은 시골을 찾지요. 시골에 가서 모내기도 하고, 고추도 심고, 옥수수, 참깨, 수박, 참외, 배추 등 여러가지 농작물을 기릅니다.

장마가 끝나고 나면 고추수확이 한창이죠. 장맛비에 움츠려 있던 고추들이 뜨거운 태양빛을 쬐며 하루가 다르게 붉게 익어갑니다.

8월에는 일주일에 두세번씩 고추를 수확해야 할 정도로 바쁜 계절이지요. 그런데 올해는 비 때문에 고추 작황이 좋지 않습니다. 남쪽 지방에는 고추밭의 70% 정도가 비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하더군요.

비가 많이 오면 땅이 항상 젖어 있기 때문에 고추 뿌리가 썩어 들어갑니다. 봄에 힘들여 심어 놓은 고추가 비 때문에 썩어 들어가면 농부들의 마음은 바싹 바싹 타오르지요. 더군다나 올해는 고추값이 작년에 비해 훨씬 비싸다고 하니, 농부들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나마 저희집은 비탈밭에 고추를 심어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작년까지는 다른밭에 고추를 심어 왔었는데, 해마다 고추농사가 잘 되질 않아 올해는 밭을 옮겨 심었습니다. 작년까지는 논이었는데, 올 봄에 밭으로 용도를 변경했지요.

600평 정도 되는 밭에 고추를 심었습니다. 고추를 심을 때도 비가 많이 내려 무척 고생을 했답니다. 밭에 가면 아이들은 저희들도 일을 해야 한다며 호미를 들고 밭을 파헤칩니다. 고추 심을 때도 고사리 손으로 고추를 심는다며 온 밭을 '빠대고' 돌아다녔지요.

힘들여 심어 놓은 고추가 그나마 작황이 좋아 다행입니다. 그런데 주말이면 어김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고추를 수확하지 못해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들이 잠깐 잠깐 비가 그칠 때 고추를 수확한다고는 하지만, 일손을 도와드리지 못하는 자식 맘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더군다는 고추를 수확하는 일은 농삿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작업이기에, 60이 넘으신 부모님들이 힘들게 고추를 수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지요.

주말에 내려가 고추를 수확해야 하는데, 비 때문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닙니다. 어머님은 "고추 다 땄으니 걱정하지 마라" 말씀하시지만, 자식된 도리야 어찌 그렇습니까.

지난번에는 열 가마 정도 고추를 땄다고 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꼭 시골에 내려가 고추를 따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일기예보를 보니 이번 주에도 또 비가 내린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된 날씨가 주말이면 비가 오냐'며 원망이 절로 들었습니다.

마음속으로 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목요일 저녁 와이프가 말합니다.

"나 내일 시골갈려고."

"왜?"

"고추 따러. 아버님이 그러시는데 내일 고추 딴대. "

주말에 또 비가 온다고 하니 아버님과 어머님 단 둘이 고추를 따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아버님과 전화통화를 한 와이프가 못내 안타까웠던 모양입니다. 저는 직장에 다니느라 내려가지 못하고, 대신 자기만이라도 다녀와야겠다고 하더군요.

결혼해서 힘든 농사일 마다 않고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던 와이프였지만, 주중에 내려가 농삿일을 돕겠다는 생각이 쉬운 것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몇 번 같이 시골에 내려갔던 처형도 함께 간다고 합니다.

금요일, 회사에 출근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몇 번이나 전화를 했습니다. 저녁 일찍 퇴근해 집안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말끔하게 해 놓았습니다. 10시가 다 돼서 와이프와 아이들이 집에 도착했습니다. 처형도 같이 왔지요. 와이프와 처형은 녹초가 다 됐습니다. 아이들만이 곤히 잠들어 있더군요. 아이들은 저희들도 고추를 따겠다며 온 밭을 돌아다니다가, 산 밑에 있는 물 웅덩이를 발견하고는 그곳에서 신나게 놀았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땅이 질척해 지고, 그곳에 흙탕물이 고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아예 그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하더군요.

"힘들지?"

"고추 몇번 따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이 따 본 건 처음이야"

하긴 그동안에는 제가 같이 시골에 가면, 와이프는 밥 짓느라고 하루종일 밭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점심 먹는 시간만 빼고 하루종일 고추를 땄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힘들에 일하고 온 처형과 와이프가 안쓰럽게만 보였습니다.

농삿일도 처음이고, 고추밭일은 더군다나 해 본적이 없는 처형은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 합니다. 제가 해야할 일을 처형이 대신 고생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처형이 고추를 따면서 아버님께 말했답니다.

"고추따는 거 정말 힘드네여."

그랬더니 아버님 왈 "고추 따는 거 무서워서 많이 못 심어유."

배부르면 운전할 때 졸릴까봐 저녁도 못먹고 왔답니다. 집에서 따온 빨간 고추에 고추장을 푹 찍어 늦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