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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난 종교 전통들의 역사적 진행 과정을 자세히 뜯어보자. 그러면 한 가지 재미있는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영국 철학자 버르란트 러셀(1872∼1970)은 이러한 역설에 유용한 통찰을 제시한다. 러셀은 "한 창시자의 추종자는 언제나 어느 점에 가서는 그 스승의 이론과 멀어지는 법"이라면서 "모든 교회는 자기보존본능을 확대시키며, 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창설자의 교리는 축소되는 법이다"고 말한다.

가령 이슬람의 경우, 무하마드와 그의 사후 세 명의 칼리프가 통치했던 라시둔(rasidun)을 기점으로 정치적 성격이 짙은 이슬람 제국으로 전개된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예수와 그의 사후 사도들이 관리했던 초대교회를 기점으로 세속 정권과 함께 가거나 또는 세속 정권을 능가하는 막강한 권력을 쌓으며 기독교 제국으로 전개된다. 유교의 경우 송명시대 신유학을 기점으로 고도로 사변화, 관학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거론은 안 했지만,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이러한 '경우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간단하다. '창시자'가 의도한 궁극적 의도와 이러한 창시자의 의중을 정통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추종자들'의 사상과 행동 패턴이 궁극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신적·사상적 변이가 자기보존본능에 의해서든, 필연적인 역사적 과정에 의해서든, 아니면 정치적 욕망에 의해서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오늘날 각 종교 창시자의 원래 정신은 희석되었을 뿐더러 변이된 교리에 따라 '살육의 역사'가 펼쳐졌다는 점이다.

해서 러셀은 "반셈족주의는 로마제국이 기독교화하던 순간부터 기독교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십자군의 신앙적 열정은 유대인 학살로 나타났다. 드레퓌스를 부당하게 고발한 것은 기독교들이었으며, 그를 복권시킨 것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고 낱낱이 고발한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범우사, 1987)를 강변한 러셀은 결국 종교라는 괴물을 무찌르고 과학적 지성의 황금시대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 영국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버트란트 러셀
"종교는 아이들로 하여금 이성있는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며, 우리가 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려는 것을 막고 있다.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묵은 죄와 벌의 사나운 소리 대신에 과학적 협동의 윤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다. 인류는 이제 황금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첫째 이 문을 막고 있는 괴물을 무찌를 필요가 있는데, 이 괴물이 바로 종교이다."

결국 문명에 대한 종교의 공헌에 회의를 가졌던 러셀은 '과격한 종교 숙청론'을 전개하며 종교없는 세상을 역설한 셈이다. 물론 러셀의 확신처럼 정말로 종교가 인류 문명에 공헌은 못할 망정 해독만을 끼친 암적 요소인지는 심각히 따져 볼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스위스 출생의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1928∼ )은 종교의 해악을 인정하면서도 종교가 인류에 끼친 유용한 공헌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한스 큉은 최근 번역된 <가톨릭 교회>(을유문화사, 2003)에서 가톨릭의 '창시자인 스승의 이론'과 멀어진 과정을 역대 교황과 교황 제도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큉은 "나 역시 지성의 탄압, 종교재판, 마녀사냥과 화형, 유대인 핍박, 여성 차별과 같은 현상들을 그 역사적 문맥에서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런 일들에 대해 용서할 수는 없다"고 고백한다.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가톨릭 지성의 자기고백이 분명 '건수(?)가 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오해는 금물. 큉이 아무리 <교황은 무오류한가?> 논란으로 1979년 가톨릭 '신앙교리성성'으로부터 종교재판을 경험하고 가르칠 수 있는 면허가 최소되었음에도, 그는 여적 가톨릭에 대한 미련과 희망이 남아 있다. 이런 뜻에서 큉은 "나는 가톨릭 교회의 교황제도를 찬성하지만 동시에 복음의 기준에 합당하게 교황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것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민주적 정신을 보여준 사람"

이와 관련해 큉이 생각하고 있는 복음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큉은 예수의 정신과 그 정신이 살아있던 초대 교회 공동체를 기준으로 내세웠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최선의 의미에서 민주적 정신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예수의 정신은 자유롭고, 원칙적으로 평등한, 형제자매들로 구성된 백성과 일치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본래 기독교의 자유, 평화, 박애 정신이었다."

▲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
덧붙여 설명하면, 예수의 자유로운 정신은 종교재판소는 물론 그 어떤 군림하는 기관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원칙적으로 평등한 것은 계급, 신분, 인종, 직책 등에 의해 분류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형제자매들로 구성된 것은 남자만의 집단이거나 개인 숭배가 아닌 것을 뜻한다. 그리고 초대 교회 공동체는 이런 예수의 정신을 심성으로 남을 섬기는 봉사의 사람들이라는 얘기이다.

사실 지식인 사회에서 종교는 금기의 주제라 한다. 얘기해봤자 결론 없고, 토론해봤자 상호 '파문' 이라는 꼬리표를 달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이런 금기를 어기고 발언하는 지식인들을 보면, 대강 종교를 무조건 부정하는 입장과 비판적 지지 입장, 그리고 무조건 지지하는 입장으로 갈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셀이 무조건 부정이라면 한스 큉은 비판적 지지 입장이다.

어떻든 간에 종교를 보는 시각과 태도는 우리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어디를 가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물론 우리 사회의 경우 무조건 지지하는 입장이 상당히 크긴 하지만. 한편 이런 복잡한 층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지는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유명한 말처럼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에 달린 일이다. 그렇다고 잘못된 감정에 치우친 무조건적인 반대와, 역시 잘못된 신심에서 비롯된 무조건적 찬성은 삼갈 일이다.

극단에 치우친 감정과 신심에서 비롯된 해악은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극단적 세속화는 실존주의로, 더 나아가 허무주의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고, 극단적 신심은 배타적, 파괴적 행동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해서, 두 지적 거장의 종교 옹호론과 반대론 곧 <가톨릭 교회>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시간이 된다면 <왜 그리스도인인가?>도―유심히 읽어보고, 이참에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를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는 것도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가톨릭 교회

한스 큉 지음, 배국원 옮김, 을유문화사(2003)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사회평론(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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