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흔히 김대중 정부가 가장 못한 일 중에 하나로 '언론개혁'을 꼽는다. 그리고 일을 망치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대략 의견일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박약했고 따라서 전략도 전술도 없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언론개혁사 5년을 되돌아보면 '블랙 코미디'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없을 지경이다.

김대중 정부는 임기 초반 '자율적 개혁' 운운하며 그들과 '밀월'을 시도하다가 스스로 '약점'을 노출시켰고, 그 결과 견디기 힘든 '공격'이 계속되자 임기 중반에 와서야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를 앞세워 칼을 뽑아 들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해 일순간 싸움판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임기 막판에 와서는 감옥에 갔던 언론 사주들은 하나둘 다 풀려나고 부과했던 과징금은 취소해 버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언론개혁' 문제는 해결은 고사하고 더욱 악화되어 버렸다. 당사자들은 기분이 나쁠지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개판'을 친 것이다.

그 결과 새로 들어서게 될 노무현 정부에게 언론개혁 과제는 시급히 풀어야 할 중대한 과제가 되었고, 노무현 정부에 거는 시민사회의 기대는 김대중 정부에 걸었던 것보다도 훨씬 커졌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노무현은 현실 정치인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언론권력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 경력을 자랑한다. 그는 자칭 '1등 신문'과 소송을 불사했으며 급기야는 인터뷰까지 거부해 버렸다. 그를 두고 '불안한 인물'이라는 부정적 평가와 '화끈한 개혁전도사'라는 긍정적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1등 신문과 벌인 '싸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무현의 이력을 보았을 때 이 문제를 대충 덮어버릴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기대의 원천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이 더 이상 신도 아니고 왕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더구나,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에 비해서도 훨씬 더 약체 정부가 될 것이라는 것이 중론 아닌가. 잘못하다가는 그나마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도 못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가장 큰 실책은 힘도 없는 주제에 그나마 잠재적 우군마저 등을 돌려버리게 만든 것이다. 사실 언론세무조사는 언론개혁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잔가지는 될지언정 핵심포인트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임기 중반에 가서야 이 잔가지를 불쑥 내밀면서 마치 언론개혁의 알파와 오메가인 양 일을 벌인 것이다.

언론 세무조사 문제가 불거졌을 때 시민사회는 '방법상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무조사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이고 또 언론개혁 문제가 참으로 오랜만에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에 홍위병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전면전을 감행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김대중 정부는 개혁 진영을 배신하고 말았다. 세무조사 이후 본격적인 언론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할 의지 자체가 아예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잡아 가둔 언론 사주는 다 풀어주더니 이제 와서는 과징금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람들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전임 정부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노무현 당선자 스스로 너무나 잘 알겠지만 그들은 결코 순응하지도 않을 뿐더러 봐주지도 않는다. 그저 상황이 불리하면 납작 엎드려 있다가 분위기가 심상찮다 싶으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일순간에 난장판을 만들어버릴 뿐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언론개혁 과제에 있어서 노무현 정부가 임기 내내 명심해야 할 것은 김대중 정부처럼 우군의 힘을 빼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대가 크기 때문에 실망은 더욱 클 것이다. '실천 의지'를 의심받는 순간 노무현 정부는 그 날로 사망하게 된다.

우선 필요한 것은 노무현 정부가 자신들을 포함한 범개혁-진보 진영의 힘이 여전히 미약하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일이다. 각자 가지고 있는 힘이 미약하다는 것을 우선 인정해야만 미약한 힘이나마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으로 모아낼 가능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해야할 일이 포지션을 잘 잡는 일이다. 언론개혁이라는 어려운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기는 포지션에서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이길 가능성이 있지 김대중 정부처럼 아예 시작부터 지는 포지션에 서게 되면 해보나마나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만약 싸움판이 '정부 vs. 언론' 구도로 짜여지게 되면 이 게임은 해보나 마나가 된다. '언론 탄압'이니 '자유 수호'니 하는 구호가 튀어나오면서 또 다시 개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가 이런 싸움을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언론개혁에 관한 한 주된 전선은 '수구언론 vs. 개혁언론' 또는 '조폭언론 vs. 시민사회'의 구도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자기 할 일 충실하게 하는 '심판'의 위치에 자리 매김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데미지를 줄이면서 전면전을 감행할 수 있다.

'심판' 노릇을 해야할 정부가 느닷없이 '선수'로 나서고 '선수'로 나서야할 개혁언론과 시민사회는 훈수를 두다가 홍위병 소리를 듣는다든지, 정부가 '심판' 노릇을 제대로 못해서 좌우협공을 받는다든지 하면 또 다시 싸움은 헝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김대중 정부의 악몽이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사기에 충분한 일련의 상징적인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작금의 상황은 어쩌면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할 무렵 언론정책의 성패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삽화로 기억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중대한 국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