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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광복을 넉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난 김교신(1901-1945)
ⓒ 박상익
<성서조선>

<김교신전집> 5-7권에 수록된 <일기>는 김교신(1901-45)이 1927년부터 1942년까지 15년 동안 간행한 월간지 <성서조선>에 매달 실렸던 신앙일기를 3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김교신은 이 시기에 서울의 양정고보, 제일고보(현 경기고), 개성의 송도고보 등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성서조선>을 158호까지 간행했다.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이자 교직에 종사하는 평신도로서, 19년 공생애(27-45세)의 대부분을 적자투성이 월간 잡지 발행에 바쳤던 것이다.

<일기>에 의하면, 김교신은 “주필 겸 발행자 겸 사무원 겸 배달부 겸 수금인 겸 교정계 겸 기자 겸 일요강사, 그 외에 박물교사 겸 영어·수학교사(열등생도에게) 겸 가정교사(기숙생도에게) 겸 농구부장 겸 농구협회 겸 농구협회 간사 겸 박물학회 회원 겸 박물연구회 회원 겸 지력(地歷)학회 회원 겸 외국어 학회 회원 겸 직원 운동선수 겸 호주 겸 학부형”의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1936. 1. 31). 그야말로 전천후.전방위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잡지 교정으로 눈이 충혈되었다거나 과로로 며칠씩 몸져누웠다는 기사가 <일기> 곳곳에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담당한 업무의 ‘종류’만 많았던 것이 아니다. 잡지를 시내 서점에 배달할 때마다 등 너머로 ‘이것도 잡지라고’ ‘팔리지 않는 잡지’ 등등의 빈정거리는 말을 듣고, 때로는 모욕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으며(1931. 4. 6), 이단자 취급을 받은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총독부의 검열에 저촉되어 잡지 발간이 기약 없이 지체되거나, 폐간 직전의 위기에 내몰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김교신은 15년을 한결같이 <성서조선> 간행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앙은 정도의 고하(高下)도 아니요, 열불열(熱不熱)도 아니요, 오직 계속하는 일이 귀하다”고 한 자신의 신념대로(1934. 7. 1), 일제에 의해 폐간 조치될 때까지 일관해서 <성서조선>을 간행했다. “네 길을 가라.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말을 하도록 버려 둬!”라고 한 시인 단테의 말처럼, 김교신은 타인의 무시와 방해 속에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 자기 길을 걸었던 것이다.

강직한 성품

<김교신전집> 독자들은 “김교신의 글을 읽노라면 양심이 찔린다”는 말을 종종 한다. 특히 김교신의 삶의 구체적인 궤적이 드러난 <일기>를 읽다보면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는다고 한다. 사실 김교신의 다음과 같은 기도를 읽으면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하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진대 내 입에서 설교를 끊으시옵소서. 그 나라보다 더 연모하는 생활이 땅위에 있을진대 한 줄 원고도 이루지 못하게 하옵소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함이 절실하옵거든, 주여, 그 때에 다음달 호의 원고를 쓰게 허락하여 주옵소서.”(1939. 3. 14)

<일기>에는 김교신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1938년 10월 2일자 <일기>에는 고향인 함흥에 갔다 귀경하는 모친을 맞이하기 위해 김교신 내외가 청량리역으로 갔다가 벌어진 사건 한토막이 소개되어 있다. 역에서 입장권 파는 매표원이 불친절, 불성실하여 김교신과 다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김교신은 쟁론 끝에 차표 판매구의 유리창을 맨주먹으로 가격하여 부숴버리고 만 것이다.

아마 역 구내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 발단의 책임이 전혀 매표원에게 있었음이 명백하여 유리창 변상의 요구도 취소되고 김교신 부부의 입장료도 안 받는다고 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김교신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의 성전확청 같은 이 사건을 보고 일반 승객들이 심히 만족해하는 양을 보면 청량리 역원들의 횡포 태만은 작금에 시작된 일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심지어 청색 제복 입은 철도 품팔이꾼까지 나에게 접근하여 찬사를 말하면서 나의 행동을 지지했다”고 한다. 옳지 않은 일을 보고 참아내지 못하는 강직한 모습이다.

▲ <성서조선>제158호에 실린 김교신의 글 '조와(弔蛙)'가 조선의 독립을 소망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다.
ⓒ 박상익
“차든지 덥든지 하라”

교우 관계를 통해서도 김교신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1933년 9월 초순 <일기>에는 김교신이 출옥하는 친구 한림(韓林)을 형무소로 마중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김교신은 동경 유학 시절부터 한림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한림이란 사람이 무슨 기독교 관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요, 이른바 ML당(마르크스-레닌 당) 사건의 주모자로서 6년여의 복역을 마친 후 석방된 것이다. 김교신은 감옥에서 나오는 한림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필경 김교신의 눈에는 ‘유물론자 한림의 당당한 모습’과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의 왜소한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이날 <일기>에 “한림 군을 백두산록의 거수(巨樹)에 비한다면 오늘 기독신자의 거개는 고층건축의 옥상 분재”에 불과하다고 적고 있다.

김교신은 그 후로도 한림과 여러 차례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1938년 9월 15일자 <일기>에도 “한림 군과 정담(情談)의 기회를 얻은 것이 기쁨이었다”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으로 잡지가 폐간의 위기에 몰려 근심에 빠져있던 1940년 6월 19일에는 한림의 집에 초청을 받아, 머뭇거릴 때가 아니니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라고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을 듣기도 했다.

“1940년 6월 19일(수) …저녁에 한림 형 댁에 부름을 받아 쾌담수각(快談數刻). 형은 본래 ML당 사건의 거두요 지금도 물론 유물론자이지마는, 여(余)의 근래의 심경을 가장 깊이 통찰하여, 준순(浚巡)할 때가 아니라고 역설하며 책망하다시피 독촉함을 받았다. 주의와 사상을 위하여 그 목숨을 던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 심지가 비열하지 않음이 가경가애(可敬可愛). 기독신도가 안 한다면 자기가 후사(後事)를 돌보아 줄 터이니 전진하라고.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다.”

한림은 후일 김교신이 흥남에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병사했을 때 장례식에서 우인(友人) 대표로 분향을 하기도 했으니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보통이 넘는 것이었다. ‘기독교인’과 ‘골수 공산주의자’ 사이의 우정―냉전적 사고에 길들여진 세대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나 매사에 뜨뜻미지근한 것을 경멸했던 김교신의 태도를 알고 나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김교신은 <일기>에서 “사상으로나 행동으로나 중성적(中性的) 인물에게는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유물주의자라도 반드시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선 범사에 철저하고야 볼 일이다”라고 일갈한다(1935. 1. 18). 이런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를 믿는다 하여도 다수의 기독교도와는 도무지 언어와 사상이 상통할 수 없는데 반하여, 소위 반(反)종교인들과는 비록 근본적인 상위로 인하여 쌍방의 완전한 일치에 이를 수는 없다 할지라도 서로 일맥이 통한다”고 털어놓고 있다(1934. 12 16).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풍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무렵의 <일기>에는 총독부 검열의 눈길을 피해 교묘하게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1938년 6월 10일자 <일기>에는 “돼지 물먹는 것을 관찰하니 그들 세계에는 강대자(强大者)가 정의자인 듯하다”고 하면서, 이웃 나라를 괴롭히는 침략 국가들을 넌지시 ‘돼지’에 비유하고 있다.

특히 독일.이탈리아.일본이 군사동맹을 맺던 1940년에는 침략국들의 만행을 ‘미친개’에 비유하며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1940년 6월 6일자 <일기>에는, “근래 셰퍼드 광견 하나가 북쪽 아이도 물고 서쪽 어른도 찢어서 야단인데, 또 불독 하나가 거의 미치기 시작한다고 해서 이웃들이 매우 불안 중에 있다고 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동네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척하면서 제국주의를 통박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셰퍼드’는 나치 독일을, ‘북쪽 아이’는 독일의 침략을 당한 덴마크.노르웨이.네덜란드.벨기에를, ‘서쪽 어른’은 폴란드를 말한다. 그리고 ‘거의 미치기 시작’하는 ‘불독’이란 1940년 6월 10일 참전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가리키는 것이다.

1940년 6월 15일자 <일기>에서도 침략 국가들을 교묘히 야유하고 있다. “동소문 경찰관 파출소에는 광견이 횡행하니 주의하라고 고시(告示). 특히 셰퍼드와 불독이 미친 모양이다.” 파출소의 고시를 빌미삼아 짐짓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미친개’로 비유했음을 알 수 있다. 점점 노골화 되던 총독부의 검열을 피하며 침략자들을 질타하자니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김교신의 글은 이런 의미에서 ‘행간’을 읽어야 흥미가 배가(倍加)된다.

신앙과 애국

1938년 7월 27일자 <일기>를 보면 김교신이 강습 차 옹진 근교의 한 광산에 견학 갔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김교신은 지리.박물 교사였다). 김교신은 갱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캄캄한 굴속에 착암기를 잡고 서있는 15, 16세 가량의 소년 한 명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광맥보다 그 소년이 그의 모든 관심을 사로잡은 것이다.

김교신은 그 소년이 마치 자기 동생, 자기 아들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갱내가 컴컴한 것을 기화로 광벽을 향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한다. 갱내에서 이런 소년 품팔이꾼 3, 4인을 만나는 대로 나이를 물은즉 16세, 학업은 보통학교도 못 다녔다 하며, 하루 수입은 55전이라고 했다. 김교신은 이 날 <일기>에 이렇게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다.

“저들도 보통학교 교육을 받고 바울을 읽으며, 예수의 복음 듣는 날 오기까지 우리가 어찌 안연히 명목해내랴.”

조국과 민족에 대한 김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동정과 연민은 1935년 9. 28일자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로마서 8장부터 낭독하려니 9장 3절 상반부까지 읽고는 목이 막혀 중단. ‘대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께 끊어지는데 이를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는 바울 선생의 일구가 나의 폐부를 찌르는 때문.”

김교신의 <성서조선>은 글자 그대로 그의 ‘성서’와 ‘조선’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일제의 감시와 검열 때문에 차마 내놓고 표현은 못했지만, 김교신의 글의 ‘행간’마다에는 그의 절절한 ‘신앙’과 ‘애국’이 속속들이 배어들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교신의 <일기>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두 계명을 온 몸으로 실천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독교사상> 2003년 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김교신전집 별권 (반양장) - 김교신을 말한다

노평구 엮음, 부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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