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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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첫 번째 경험은 기억에 남는다. 오래전 내가 처음 발표한 평론은 양귀자 작가와 임철우 작가를 다뤘다. 그때 읽었던 임철우의 <붉은 방>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8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을 칼럼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었다.
화제가 되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Zone of Interest>(아래 <존>)를 보고 나서 문득 임철우 소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임철우 작품이나 <존>을 두고 국가폭력, 나치즘, 인종주의, 학살, (반)유대주의 등을 논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내가 주목하는 건 이들 작품에 드러난 캐릭터들이 보이는 무사유, 정확히 말하면 방향을 잘못 잡은 사유의 문제다.
어떤 평에서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언급하면서 <붉은 방>이나 <존>에 드러난 무사유, 혹은 악의 평범함을 부각한다. 타당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붉은 방>에서 공안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인 최달식이나 <존>의 핵심인물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그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잔드라 휠러)는 평범한 악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논리로 치밀하게 합리화하고 생각한다. 사유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사유의 바탕을 보려고 하지 않고, 튼실하지 않은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할 뿐이다. 합리성에도 급이 있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이것이다.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괴물의 탄생'은 어떤 맥락에서 가능한가?
무관심과 외면이 만드는 '괴물'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더욱 두드러지는 점은 이성과 믿음의 관계다. 제대로 된 믿음은 이성의 축적 위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지금 득세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따져봐서 옳으므로 믿는 태도가 아니다. 그 반대다. 합리적 근거가 있든 없든 '내'가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이 먼저다. 그걸 정당화하려고 사후적으로 이성과 논리가 동원된다.
최달식은 공안 형사로서 소임에 충실하다. 자신이 국가를 어지럽히는 악을 처단한다고 굳게 믿는다. 악의 근원인 빨갱이를 제거하는 것은 공적으로는 국가를 위한 것이고 사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어렵게 만든 적에 대한 복수다. 그가 겪은 모든 불행은 6·25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주변 사람, 어렵게 살아남은 아버지가 어린 최달식 앞에서 빨갱이라고 지목된 이들을 총살한 일, 전쟁 후에 술주정뱅이가 되어 철도사고로 최후를 맞은 아버지, 그 충격으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 등 모든 원인은 저들에게 있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믿는 게 관건이다. 적으로 지명된 자들은 그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나 물건이 된다. 영화 <존>에서도 확인하는 점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적으로 분류되는 순간 어떤 인간은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존재, 감정을 투사할 필요가 없는 사물이 된다. 그래서 이런 장면이 가능해진다. 어이없는 이유로 고문의 대상이 된 교사 오기섭은 공권력으로 포장된 고문 가해자들에게는 오늘 처리해야 할 일거리일 뿐이다.
"보나 마나 뻔하지 머, 외상값 독촉이겠지. 어제가 월급날인데, 외상 같은 것 없어. 그건 자네한테나 해당되는 사항이겠지. 아이구, 그나저나 쥐꼬리만한 월급에 이것저것 떼고 나니깐 마누라 얼굴 보기가 민망하더라구. 어이. 그쪽 좀 잘 잡아, 물이 튀기잖아. 참. 이 친구는 제법 잘 참는데, 독종이라 그렇지. 쓰발. 암만 생각해도 때려치우고 장사나 할까. 이번이 보너스 타는 달이데, ...... 점점 사지의 힘이 빠져나간다. 이젠 버둥거릴 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