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5 20:25최종 업데이트 24.06.25 20:25
  • 본문듣기

18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한·일·중 3국 협력 국제포럼 개회식에서 미즈시마 고이치 주한일본대사가 축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주한일본대사 교체가 완료됐다. 강제징용 문제로 한일관계가 격동한 시기인 2017~2019년에 주한대사관 총괄공사로 근무한 미즈시마 고이치가 지난 4월 9일 임명된 데 이어 지난 17일 한국에 들어왔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주일한국대사를 교체할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23일 보도에 따르면, 박철희 국립외교원장이 윤덕민 대사의 후임으로 내정됐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외교안보연구원과 서울대 교수를 거쳐 2023년 3월 국립외교원장이 된 박철희 내정자는 윤석열 대선캠프의 일원이었다. 윤 대통령이 당선인일 때인 2022년 4월 27일에는 당선인 친서를 들고 아베 신조 등을 만나는 한일정책협의대표단의 일원이었고, 작년 1월 12일에는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떠안고자 외교부가 개최한 강제징용 공개토론회의 사회자였다.

두 정부가 지금 시점에 대사를 교체하는 이유는 양 정부의 외교 목표에서 확인된다. 한중일 정상회의 기간인 지난 5월 2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회담한 두 사람은 2025년에 한일관계를 업그레이드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날 나온 <마이니치신문> 기사 '일·한 수뇌 2025년 국교정상화 60년 준비'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 되는 2025년을 목표로 한일관계를 한층 높게 끌어올리는 역사적 전기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자 한다"고 말했고, 기시다 총리는 "고비가 되는 해에 일한관계를 더욱 비약시키기 위해 윤 대통령과 내가 각자의 정부에 지시해 준비를 진행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작년 7월 13일 일본 여성지 <조세지신>에 나루히토 일왕의 2025년 한국 방문이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궁내청 및 수상관저 관계자의 인터뷰에 기초한 이 기사는 2025년에 일왕의 방한을 실현시키고 이 방한을 "일한관계의 최종 마무리"로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역사문제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지향하는 것이 2025년 일왕 방한의 목표라는 것이 기사의 핵심이다.

2025년 한일관계 업그레이드 추진

윤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내년 한일수교 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보다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양국관계로 한 단계 도약시켜 나가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5월 26일 정상회담 때 재차 확인한 것이다. 박철희 내정자도 3·1절 이틀 전인 2월 27일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를 통해 "2025년이 양국에 분기점이 된다"며 새로운 한일공동선언을 제안했다.

이 같은 최근 흐름은, 박철희와 미즈시마 고이치가 대사로 투입되는 배경을 시사한다. 한일협정 60주년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부터 세 번째 을사년인 2025년에 반성과 배상 없이 한일관계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필요한 마인드를 가진 인물과 한일 역사문제를 한국 현장에서 경험해 실무적 대응력이 있는 인물이 지금 시점에서 투입된다는 점이 시선을 끈다.

양국의 대사 교체가 끝난 뒤에 전개될 향후 흐름에서 특히 두드러질 것으로 전망되는 현상이 있다. 강제징용 제3자 변제를 추진할 때 그랬던 것처럼, 두 정부가 김대중 대통령을 한 번 더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윤 정부와 기시다 내각은 실제로는 박정희를 모델로 제3자 변제를 추진하면서도 겉으로는 김대중을 모델로 하는 듯이 했다. "양국이 과거를 직시하고 상호 이해와 신뢰에 기초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제3자 변제를 추동하는 원동력인 것처럼 홍보했다.

윤석열·기시다 정부가 과거를 직시하지 않고 덮어뒀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방식으로 한일관계를 끌고 나간 것은 박정희지 김대중이 아니다. 김대중은 식민지배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과거를 직시"하자는 말은 했다. 그런데도 윤석열·기시다 정부가 김대중을 운운한 것은 식민지배 반성과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인 상당수가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점을 감안한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김대중을 제3자 변제에 활용했던 양국 정권이 2025년 한일관계 업그레이드 추진 과정에서는 김대중을 버리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은 박철희 내정자의 최근 말과 글에서 확인된다.

박 내정자는 윤 정권 출범 6개월 뒤인 2022년 11월 17일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 9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한일관계의 미래'를 주제로 발표했다. 이날 그는 윤 정권 출범 첫해인 '2022년'을 시사하는 '해방 이후 77년'이란 표현을 여러 차례 쓰면서 이 시점의 한일관계가 이전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전에 준비된 발표문에서 그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논함에 있어 해방 이후 77년이 지난 지금 변화된 한·일 간 역학관계를 적절히 반영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라며 "해방 후 77년이 지나는 동안 한일관계에서 나타난 변화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뒤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는 한일관계를 더 이상 발전시키기 힘들다는 인식을 표시했다.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하다'는 논리
 

지난 5월 20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 신협력 비전 포럼에서 박철희 국립외교원장의 사회로 라운드테이블 '한일관계의 현 단계와 미래 비전'이 진행되고 있다. ⓒ 연합뉴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서 양국 지도자는 과거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간다는 원칙을 합의하고서도 과거사 현안을 둘러싼 갈등과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의 비례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한국인들의 관심을 과거로부터 미래로 돌리는 데 실패했다는 박 내정자의 인식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그가 생각하는 업그레이드 선언에서는 과거의 비중이 현저히 낮아지게 될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그가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하다'며 내세울 논리들이 위 발표문에 담겨 있다. 그는 한국이 더 이상 반성과 배상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이유로 한국의 국력 증대를 거론했다. 그는 "한일 간 수직적 지배-피지배 관계는 사라지고 수직적 협력관계를 거쳐 점차 수평적·병렬적 관계로 이행해왔다"고 한 뒤 "한국을 일본의 피해자와 약자로만 이해하는 것은 한일관계의 현재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국력이 강해졌으므로 더 이상 일본을 가해자로 대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가해자 대 피해자의 구도'와 '강대국 대 약소국의 구도'가 별개임을 간과한 동시에, 피해자가 힘이 강해져야 가해자의 반성과 배상을 받아낼 수 있다는 현실적 이치를 무시한 주장이다.

그가 과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할 근거로 제시한 또 다른 것 중 하나는 한일이 쌍둥이라는 점이다. 위 발표문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 그해에 <한국과 국제정치> 제38권 제1호에 기고한 '한일관계: 50년의 경험과 교훈'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기고문에서는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기주쿠대학 명예교수의 말을 인용해 "국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일은 쌍둥이 국가에 가깝다"고 말했다.

오코노기 교수는 2010년 3월 30일 자 <동아일보> 기고문 '서로 배우고 닮아가야 할 한-일'에서 한국과 일본을 "동일한 산업구조와 기술수준, 사회체제를 가진 쌍둥이 국가"로 표현했다. 이런 쌍둥이기 때문에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로 가야 하므로, 한국인들의 관심을 '과거 직시'에서 '미래 지향'으로 돌리는 데 실패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게 박철희 내정자의 생각이다.

박철희 내정자가 향후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를 내세우며 공동선언의 2025년 연내 업그레이드를 주장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말들만 놓고 보면, 한국이 강해졌고 한일은 쌍둥이므로 과거 피해를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웠던 윤 정권이 앞으로는 이 선언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며 김대중을 폄하하는 진풍경을 보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