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4 17:10최종 업데이트 24.06.2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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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글은 역시 읽는 것이지 듣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듣는 것도 속도를 조절하거나 한 글자 한 글자 나눠서 듣거나, 반복해서 들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눈으로 단어와 문장을 보면서 나만의 속도로 뜻을 음미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은 다 잊어버린 점자를 다시 배워볼까 할 때도 있고, 시도 아닌 산문을 외워서 음미해 볼까 할 때도 있다

얼마 전에 피천득의 <수필>이란 제목의 수필을 들을 때도 그랬다. 교과서에서 수필의 정의를 배웠고, 이런저런 책에서도 수필이란 문학 장르에 관한 설명을 읽거나 들었지만, <수필>에서만큼 내 마음이 끌린 적은 없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글 전체가 수필은 무엇이라고 직접적으로 비유하거나 설명하고 있었는데, 모두 다 외우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작가 피천득이 청자 연적을 보고 느낀 마음

그런데 그 첫 문장,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는 왠지 뚱딴지같았고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냥 연적도 아니고 청자 연적?'

도대체 이게 뭔 소리일까 <수필>을 듣는 내내 머릿속이 간질거렸는데, 글 끝에 그 답이 있었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청자 퇴화연화형 연적,' 꼬부라진 단 하나의 연꽃잎, 균형 속에 있는 파격, 이것이 마음의 여유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을 가져오는 마음의 여유. 이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동안 내가 그토록 바랐고 이뤘어야 했던 그것, 그게 바로 작가 피천득이 청자 연적을 보고 느낀 마음의 여유였다.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나는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손길 닿는 대로 썼다. 그렇다고 소설처럼 허구를 말하지는 않았고, 가상의 인물이나 장소를 만들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마음이 허락하고 머리가 기억하는 것들을 쓰려했다.
때론 무대 위 배우의 독백처럼, 때론 보고 싶은 옛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때론 사랑하는 이와의 가벼운 대화처럼 그때그때 떠오른 하고 싶은 말을 썼다.

이렇게 한 편 한 편 글을 써 가면서 나는 굳이 어떤 장르의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글들이 문학 장르로서의 수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 내 글은 <수필>에서 말한 대로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하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 하는 글이었을까?

너무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지금이 딱 그렇다. 어찌 감히 이런 질문을 내가 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질문을 잘못했다. 작가 피천득은 수필이란 문학 성격이 그렇다고 한 것뿐이지 그런 수필을 써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글감이나 글재주와는 별도로 글 쓰는 이는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을 이뤄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물었어야 한다.

"나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었던가?"

폭주하는 감정의 코끼리

지난날의 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한숨이 나온다.

나는 시력을 잃고 알게 된 이 세상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고,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 전혀 다른 세상도 아니란 걸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맘먹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 뜻과는 달리 점점 더 하소연하고 싶어지고, 변명하고 싶고, 억울해서 화가 나면서도 어이없게도 한편으로는 위로받고 싶어졌다.

이야기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타고 가야 할 감정의 코끼리는 너무도 쉽게 자극을 받았고 그만큼 자주 폭주했다.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감정에 충실하고자 할  뿐이었는데, 그럴수록 그 코끼리는 더욱더 사나워졌고, 마치 전쟁터를 누비듯 거침없이 내달려서 글 속에는 온통 분노와 비난, 억울함과 절망의 잔해만이 즐비했다.

강박이나 속박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보지 못한다는 강박과 속박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파격은커녕 균형조차 없이 글을 쓴다고 나선 셈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남몰래 자책하고 애태운 때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그럭저럭 긴 시간을 견뎌내는 동안 무릎이 꺾이지 않은 덕분에 잠시나마 나를 떠나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나는 폭주하는 감정의 코끼리가 짓밟은 감정의 잔해들을 보면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많이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내 이야기라도, 아무리 솔직한 감정이더라도 내가 그 감정에 속박되거나 솔직함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글이 아닌 감정의 쓰레기 처리장이 되고 만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마음의 여유가 꼭 필요한 이유란 걸 깨달았다.

이제 나는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려 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나는 내가 가진 문제점을 알고 있고,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할 것이고, 그런 나를 도와줄 사람도, 응원해 줄 사람도 있으니까.

대책 없는 긍정? 지나친 낙관? 아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빼버린 거고, 더 이상 창피하게 징징대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난 긍정적 미래를 확신하지도 않을 거고, 행운이나 기적을 기대하지도 않을 거다. 억지를 부리지도 않을 거고, 유별난 주장을 하지도 않을 거다. 그냥 내 마음과 내가 아는 사실을 말하려 한다.

어차피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른다. 모른다는 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나는 두 가지 모두를 바랄 수 있다. 그럼 당연히 좋은 걸 바라야 하지 않을까? 좋은 걸 바란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굳이 나쁜 결과를 바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좋은 결과를 바라면, 바라는 걸 하기 위해 현재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닐지라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데 아주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다. 그리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데 기분이 나쁠 리도 없다.

다만, 여기에도 조건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때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마음의 여유는 단순히 무엇을 하지 않거나 느리게 하는 나태와는 다르다. 넉넉하고 남음이 있어서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뭔가를 마주하는 마음의 여유는 무엇을 하지 않는 '없음'이나 '빼기'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 하는 '있음'이요 '더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면 반드시 무언가를 마주하거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놓지 않으려 한다. 나만의 세상도 만들고 나만의 주인공들과도 어울리련다.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정말 어렵고 때론 고통스럽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라는 건 자유이고 공짜지만, 얻으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니까.

언젠가 내게도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내가 쓴 글이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해 보이고,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할 수도 있을 거"란 야무진 꿈을 꿔 본다.

우리 삶 전체에 필요한 마음의 여유
 

'마음의 여유'는 나태와는 다르다. 나 스스로에게 뭔가를 보탤 수 있도록 뭔가를 하거나 마주해야 맛 볼 수 있다. ⓒ 김미래/달리

  
마음의 여유는 글을 쓸 때만 필요한 게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삶 전체에 꼭 필요한 것이 마음의 여유가 아닌가 싶다.

오래전부터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일이 아니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이며, 22%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사소한 것이고, 4%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결국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96%의 걱정 때문에 우리는 해야 할 것을 못 하고, 웃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도 못 자면서 자기를 힘들게 한다는 소리다.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데 난 남들보다 더 걱정이 많은 성격이니까 어쩌면 더 바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가져 보려 한다. 내가 뭘 걱정하는지 찾아보고, 그것이 절대 일어날 수 없거나, 이미 일어난 거거나, 무시해도 좋은 사소한 거거나, 도저히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거라면 그냥 잊어야겠다. 그리고 나머지 꼭 필요한 4%는 이왕이면 좋은 결과를 바라면서 반드시 뭔가를 해야겠다.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그럼 할 수 있을 만큼만 해야겠다. 해 봐서 손해 볼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안 하는 것이 손해고 바보짓이다. 난 이미 충분히 손해도 봤고 바보짓도 지겹게 했으니까, 아무리 어렵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통해 나만의 파격을 꿈꿔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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