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14 06:59최종 업데이트 24.06.14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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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창립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WTO 사무총장이 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까지 세계 경제는 1995년에 등장한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이 주도했다. WTO를 주도한 미국은 차별 없고 공정한 자유무역으로 세계가 공동 번영한다는 믿음을 퍼뜨렸다. 마침내 2001년 중국이 가입하면서 WTO는 지구촌의 교리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유무역 질서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주도로 사실상 무력화되고 있다. 자유무역을 통해 공동 번영한다는 믿음과 달리 자동차, 반도체, 전자 등 제조업들이 중국, 한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로 이동하면서 미국의 제조업과 일자리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19로 핵심 기술과 공급망의 취약성이 드러난 미국은 제조업 부활을 위해 국경을 닫는 길을 선택했다.

미국의 녹색무역전쟁 주역이 된 한국 기업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제조업 부활은 어떻게 시작했을까? 2030년까지 미국 온실가스 52% 감축 목표를 세운 바이든 정부는 전기자동차, 청정에너지, 반도체에 사활을 걸었다. 다만 미국 안에서 제조업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미국은 이를 위한 투자 장벽을 설계했다. 해외 자본들이 미국에 직접 해당 제조업을 세워야 보조금을 지원하는 제도인데, 2022년 8월에 실시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그것이다.

아울러 무거운 수입관세를 부과해서 미국이 경계하는 나라들의 제품도 봉쇄해야 했다. 5월 24일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것을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녹색무역전쟁'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미국의 전략에 적극 참여한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 기업들은 청정에너지 개발과 중국 제품의 봉쇄에도 한몫했다.


2023년 11월 16일 백악관은 보도자료를 통해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한국이 미국에 직접 투자한 규모가 555억 달러(76조 3125억 원)라고 발표했다. 주로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반도체로, 미국이 원하는 청정, 첨단 제조업들이다. 같은 기간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직접 투자한 총 2000억 달러(275조 원) 중 한국이 28%를 차지해서 단연 1위다.

2022년 2월 8일 미국의 외교 전문지 <디플로매트>에 따르면 과거 2019년까지 한국이 미국에 직접 투자한 규모는 14위로,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아일랜드나 벨기에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역대급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의 자본 유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3년 7월 23일 미국 에너지부는 한국 배터리 제조업체 'SK온'과 '포드자동차'의 합작기업 '블루오벌SK'(BOSK)가 미국 테네시주와 켄터키주에 114억 달러(약 15조 6750억 원)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미국 배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이 사업체를 통해 매년 4억 5500만 갤런(약 207만 톤)의 휘발유를 줄이고 7500명의 일자리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2023년 10월 16일 미국 조지아주 달튼에 위치한 한화큐셀 태양광 공장 내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한 기후 법안이 통과된 이후 미국에서 생산을 시작한 최초의 태양광 패널 공장이다. ⓒ 연합뉴스

 
2022년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태양광 전지와 패널 수출의 83.6%를 미국이 차지했다. 세계적인 태양광 기업인 한화큐셀이 이를 이끌었다. 2023년 12월 한화큐셀은 충북 음성의 태양광 모듈 공장을 폐쇄하고, 2024년 4월 중국 장쑤성의 중국 법인도 중단했다. 한국, 중국에서의 판매 부진이 이유다.

대신 이들은 미국으로 이동했다. 미국 조지아주에 25억 달러(3조 4375억 원)를 투자해서 연간 모듈 생산 8.4기가와트 규모로 미국 최대 태양광 사업장을 만들고 있다. 아울러 한화큐셀은 중국 제품의 미국 수입 봉쇄 역할도 해낸다.

4월 24일 <블룸버그>는 한화큐셀 등 7개의 태양광 업체가 미국무역대표부(USTR)에 동남아시아에서 수입되는 양면형 태양광 패널에 관세부과를 청원했다고 보도했다. 미국태양광협회(SEIA)에 따르면 미국에서 양면형 태양광 패널 비중은 82%를 차지하고 있고 사실상 중국 제품이다. 한화큐셀이 이렇게 중국에 대한 미국의 녹색무역전쟁을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그동안 미국 태양광 설치 업체들은 값이 싼 중국산 태양광 패널을 선호했고, 관세부과를 반대했다. 태양광 제조업 부활을 꿈꾸는 바이든 정부를 좌절시킨 이유다. 그런데 미국 최대 태양광 제조사 한화큐셀의 청원이 바이든 정부에 명분을 준 것으로 보인다.

5월 14일 백악관은 한화큐셀의 청원대로 무역법 301조를 발표해 태양광 패널에 50% 관세를 부과하고, 당장 6월부터 시행한다고 했다. 그런데 중국산 철강과 알루미늄 25%, 컴퓨터 칩 50%, 전기자동차 100% 관세부과도 함께 발표했다. 무역법 301조는 미국 대통령이 의회 승인 없이 무역 상대국의 불공정 관행에 보복할 수 있는 조치다.

미국이 무역법 301조를 발표한 5월 14일, 중국 외교부는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부과는 세계무역기구의 규범을 위반하는 것이고, 중국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5월 22일 미국 격월간지 <포린폴리시>는 "중국이 자유무역 교리를 지지하고, 미국이 편협한 보호주의를 지지한다"라면서 '흥미로운 반전'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보호주의에 대해 중국은 어떤 조치를 준비하고 있을까?

과학대국을 향한 중국, 무역적자로 가는 한국
 

지난 3월 8일(현지시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2차 전체회의에 참석해 리창 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중국은 기술과 과학의 고도화를 추진하고,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다자협의체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이 중국의 조치로 보인다. 지난 3월 5일 열린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리창 국무원 총리는 업무보고를 통해 '중국 정부가 중국 경제를 구하는 길은 새로운 기술과 과학 시스템에 있다'고 선언했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이제 세계적인 과학대국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전인대를 취재한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2026년이 되면 중국의 과학·기술 분야의 기여가 과거 중국의 부동산 붐을 능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선진화된 기술이 중국에 대안적인 성장 엔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은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라는 새로운 국제협력체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이 2014년 이후 추진해 온 대륙과 해양의 경제 벨트인 '일대일로'가 주로 대규모 투자에 중점을 두었다면,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는 개도국에 대한 빈곤 저감, 기후변화 대응, 청정에너지를 지원하는 협력체다. 이 협력체는 스마트 제조업, 녹색 제조업 등 산업화를 함께 지향하고 있다.

2021년 11월 아프리카 협력 포럼에서 시진핑 주석은 53개 아프리카 국가에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고, 2022년 11월 아세안 정상회의에서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60개 이상의 나라들이 여기에 가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2023년 6월 국회도서관이 발간한 <중국의 신국가 전략: 3대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주요 내용과 함의>에서 중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이니셔티브는 '미국을 견제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중국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은 과학과 기술, 글로벌 협력체를 통해 미국의 녹색무역전쟁에 대응하는 해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이 찾은 길이 한국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2023년 1월 19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이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2023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서 '행동하는 연대를 위하여'를 주제로 연설하고 있다. ⓒ 대통령실


2023년 한국의 대중국 무역이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처음으로 180억 달러(24조 7500억 원) 적자를 보았다. 산업연구원의 〈2024년 경제 산업 전망〉 보고서는 중국의 제조업 경쟁력 향상으로 중간재 자급률이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의 중국 수출품 80%가 중간재라는 점에서 중국의 과학과 기술 고도화는 한국의 수출 부진을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2024년 한국 정부가 4조 6000억 원의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한 것은 중국의 과학대국을 향한 노력과 명백히 대비된다.

2023년 1월 세계경제포럼에 참가한 윤석열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한국의 제조업, 특히 전기차 배터리와 반도체의 강점을 강조했다. 한국이 글로벌 주요 국가가 되고, 세계적인 공급망에서 중요한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말 그렇게 가고 있는가? 지금 한국의 제조업은 위태로운 상황에 있다. 한국의 탈탄소와 일자리를 만들 청정 제조업들이 떠나고 있다. 한화큐셀이 밝혔듯이 한국에 수요가 없어서다. 제조업이 떠나는 것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불행이다.

미국, 중국이 만들고 있는 글로벌 장벽의 목표는 자국 제조업 보호에 있다. 한국 국민총생산에서 제조업 비중은 28%로, 중국의 27.4%보다 높다. 그런데도 왜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을까? 기후대응, 청정산업, 공동체 보호, 국제협력을 포괄하는 확고한 비전을 갖추어야 한국의 미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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