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8 16:39최종 업데이트 24.05.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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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아버지는 대구 매천시장에 밀집한 상회에서 일하셨다. 집에는 배추, 마늘, 대파가 제철마다 쌓였고 어머니의 김치는 사시사철 맛이 일품이었다. 방학 때마다 밀짚모자 쓴 부모님을 따라 논두렁을 뛰어다녔고, 머리가 굵어졌을 무렵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동학농민운동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바탕은 농부의 그것과 무관하진 않겠다 싶었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도시의 소시민이 되어 마트를 돌며 빨갛고 봉긋한 사과를 고르기나 할 뿐이지만.

그 사과가 금값이 되어, 며칠 전엔 반려자와 동네 세 바퀴를 돌았다. 네 개에 만 원짜리가 낙점되어 장바구니에 담고 나서야 진이 다 빠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냉해(사과꽃이 피었을 때 갑자기 온도가 급감해 꽃이 얼어죽는 현상)로 수확량이 줄어든 데다 농민에게 불공정한 경매 구조라는 이중고 속에서 가격이 폭등한 것인데, 그때 비로소 '먹기 위해 취급했던' 농산물의 기원을 생각했다. 사과를 심고 기르는 농부의 일을 처음 곱씹어 보았다.


농업에 종사하거나 연구하지 않는 이상 농부 일에 관심 갖는 일은 쉽지 않다. 기후위기와 생태학을 말하는 책은 매일 출간되다시피 하지만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농부 본연의 삶'에 집중하는 책은 드물다. 최근 농업 카테고리에서 출간되는 책들은 대다수 유기농 밥상, 직접 해 먹는 생태 요리 레시피, 텃밭 가꾸는 방법, 은퇴 뒤 귀농 노하우 등에 치중돼 있다.

농부 시선으로 써내려간 하루 
 

책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 ⓒ 씽크스마트

 
그나마 독자들이 매체에서 한두 번 들어봤을 법한 단어는 '정의로운 전환'쯤 될 것이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기후위기 시대, 탄소중립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농민이나 중소상인 등 노동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정책의 방향을 일컫는다. 솔직히 이 단어, 별로 와닿지 않는다.

농민의 삶은 도시 소시민에게 멀게 느껴진다. 친환경‧유기농 단어는 대기업에서 남발하는 마케팅 수단이 된 지 오래다. 농산물을 일구는 농민의 삶은 먹고살기 힘들거나 이상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고, 농민들이 친환경 농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부 정책은 언제나 추상적이다. 환경 이론을 주창하기보다 일찍이 밭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 농민 스스로 매일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 보고 싶어졌다.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은 그래서 반가운 책이다. 이 책은 2007년 경남 함양 지리산 기슭으로 삶의 터전을 잡고 농사를 시작한 농부이자 환경운동가, 시인인 김석봉의 에세이. 저자는 집주인이 빚에 쫓겨 야반도주했다는 어느 집 앞에 드넓게 펼쳐진 지리산을 마주하고는 운명처럼 귀농을 결심한다.

그 후 가족 3대가 한 곳에 자리 잡아 감자, 양파, 배추, 파, 옥수수, 완두콩 등 다양한 농산물을 화학비료 없이 재배해왔다. 토박이들 텃세에 서운했다가도 새 이웃과 정을 나누고, 유기농 소농임을 자랑스러워하다가도 품과 에너지가 곱절로 드는 친환경 농사의 고투와 보람을 정직하게 고한다.

이 책은 '문장보다 사람에게 먼저 반해' 읽기 시작했다. 몇 해 전, 지리산둘레길 3코스 중간에 위치한 민박집 '꽃별길새'에서 머무른 적이 있다. 등산객이 한 명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험한 날씨였는데, 아궁이 장작불을 뗀 작은방에서 십 년 묵은 피로를 싹 날려 보냈다.
 

필자가 묵었던 지리산 민박 '꽃별길새'의 작은방. 아궁이 뗀 방에서 십 년 묵은 피로가 싹 가셨다(출처: 꽃별길새 페이스북). ⓒ 꽃별길새

 
회사일로 스트레스가 고공행진할 무렵이었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환대해준 그와 아내 앞에서 나와 반려자는 뜨끈한 밥과 정갈한 반찬으로 몸을 데우며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산삼 같은 행복이었다.

민박집 앞으로 내다보였던 천왕봉, 마당 가득했던 거위와 개, 고양이와 리코더 소리를 냈던 신비한 개구리까지. 그 하루들을 떠올리면 품을 넉넉히 내주는 그의 집 방 한 칸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차오른다.

당시 민박 아랫집 '안녕' 카페에서 그의 아들 내외 부부가 둘레길에 나서는 우리 부부에게 고구마를 손수 싸주셨는데, 살면서 맛본 고구마 중에서 으뜸으로 달았다. 김석봉 농부가 손수 재배한 고구마였다.

단골 많은 민박이라 필자를 기억할 일 만무하겠지만, 시종일관 나무를 나르고 아궁이를 비워내며 농사일을 하러 채비하는 저자를 슬쩍슬쩍 보았다. 잔정 많아 보이는 어른이었다. 두 번째 머물 적에 마침내 그가 쓴 책에 사인을 받았는데, 그는 대문짝만하게 독자 이름을 써주고는 담백하게 자리릍 털고 일어나 하던 일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저자에게 반한 것인데, 그의 매력은 또 있다.
 
"마을기업을 하고, 체험마을을 운영하면서 함께하는 이웃 노인네들이 말이 안 통한다며 마구 윽박질렀던 것 같다. 그들이 살아왔던 그 오랜 세월을 이해하지 못하고 송두리째 갈아엎어버리려 했던 것 같다. 답답하다고, 갑갑하다고, 왜 그리도 못 알아듣느냐고, 내가 이처럼 희생을 하려는데 왜 그리도 이해를 못하느냐고 짜증과 투정으로 '가오'를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
-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김석봉) 중에서
 
1987년 진주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다 문익환 목사를 만나 사회운동을 시작한 그는 환경운동에 투신해왔다.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이자 녹색당 창당발기인이기도 했던 저자는 지리산 근방으로 터를 잡고 마을 이웃들과 마을기업을 설립했지만, '도시에서 데모나 하던 빨갱이'라는 조롱을 받으며 내쫓겼다.

농사 짓는 이웃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낙인에 황망했지만 이곳 또한 도시처럼 제각기 다른 삶이 별천지로 벌어지는 곳임을, 산골 사람들이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담담하게 자각한다.

저자 김석봉은 은연중 귀농 후 지역민 위에 서고자 했던 운동가 혹은 지식인으로서 태도를 돌이켜보며 자성한다. 그렇다 해서 원주민을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는다. 다만 산골에서 사는 인생들의 보편을 몸소 익히며 농부 일의 보람을 차차 만끽해간다. 환경운동을 하며 불렀던 <불나비>나 <광주출정가> 대신,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서정적이라며 산골짜기에서 익힌 노동의 찰짐을 위트 있게 전한다.

'도시를 위한 생산지' 너머 농촌
 

저자 김석봉씨와 아내 정노숙씨가 운영 중인 지리산 민박 꽃별길새의 식탁. (출처: 꽃별길새 페이스북) ⓒ 꽃별길새

 
제초제를 안 쓰려고 삼복더위 아래 남보다 곱절로 일하다 물비누로 몸을 씻으면서 이게 무슨 친환경일까 자문한 일, 기운 좋은 지리산 산골로 으리으리한 승용차를 몰고 와 주말마다 즐기고 가는 도시인을 마주한 일, 장터에 나온 닭과 개를 거둬들이고 함께 사는 삶의 즐거움을 누린 일. 책에는 '유기농 소농'의 행복이 평범한 직장인의 행복만큼 소박하게 이어진다. 하루가 다르게 독거노인 이동 목욕차가 들락거리는, 고령화 돼 가는 산골의 풍경도 상세히 옮겨낸다.

"왜 이렇게 힘들여 양파를 심어야 하는가" 어느 날 밭이랑을 타며 질문을 던졌다는 저자는 농업의 가치를 구구절절 말하는 대신, "살기 위해" 일한다는 노동의 가치를 되새긴다. 궁핍한 봄철의 한때를 뜻하는 춘궁기에 양파를 수확해야 살아갈 수 있다며 화학비료를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여전히 이어 간다.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이 한 농부의 삶과 마음을 정밀하게 들여다보게 해준 기록이라면, <모두를 살리는 농사를 생각한다>는 과수‧축산‧시설 등 분야별로 종사하는 농업인들이 기후위기 시대의 농사 현황과 대안을 모색한 기록이다.

여전히 농업이, 농민이, 1인분의 농부가 도시를 전전해온 자신의 삶과 유리된 채 까마득해 보인다면 일독을 권한다. 농민 역시 노동 현장의 개선을 위해 광장에서, 시위 현장에서 투쟁하는 시민임을 알게 하는 목소리들이 알곡 찬 곡식처럼 실려 있다.
 
"(농민은) 소비자가 도와주지 않으면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농민이 지원의 대상이라는 인식은 은연중에 지원의 대가로 안정적으로 먹을거리를 생산해야 하는 존재로 만든다. (중략) 농촌을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식량을 생산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다. 많은 농민은 지원 이전에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자 한다."
-<모두를 살리는 농사를 생각한다>(녹색연합) 중에서
 
먹기만 할 줄 알지, 어떻게 심고 키우는지 들여다볼 노력조차 하지 않은 한 독자는 농부님들이 쓴 두 권을 통해 다음과 같은 앎을 얻었다.

첫째, 유기농법이나 친환경 농사를 권장하기 전에 제각기 노동의 형태가 다른 농민들의 현황을 분석하고 그에 걸맞은 지원 정책을 수립하는 일이 시급하다. 모든 농촌 지역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정부의 탄소중립 농업 제도는 '농민에 대한 이해' 없이 수립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화학비료를 쓸 수밖에 없는 농민 당사자들의 사정을 우선 청취해야 한다.

둘째, 농촌을 휴양지 혹은 '도시민이 먹어야 할 농산물을 생산하는 곳'으로만 인식하는 도시민의 농민에 대한 이해 역시 필요하다. 오랫동안 지역소멸 문제를 연구해온 배문규 <경향신문> 기자는 수도권-비수도권 격차로 인한 차별을 감지하는 민감성인 '지역인지감수성'을 모두가 길러야 할 때라고 지적한 바 있다.

농부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풀과 나무, 논밭과 산천이 무한정 떠오른다면? 어쩌면 한국 미디어는 농촌을 반복적으로 '비슷비슷한 녹색의 이미지 타운'으로 덧씌우고, 일하는 이들의 개별적 삶을 몰이해하게 만들어온 건지도 모른다.

여전히 농촌을 쉴 수 있는 휴양지쯤으로 여긴다면? 농산물의 가격이 왜 천정부지 오르는지, 자식처럼 키운 작물들을 광장에 쏟으며 쇳소리로 투쟁하는지 농민의 마음을 한 톨이라도 헤아릴 기회는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자라는 것들이 아름다웠다." 하염없이 괭이질을 하며 흙 위에서 삶을 예찬하는 농부 김석봉은 아름다움 이전에 수반되는 노동의 고통을 책에 날씨처럼 기록했다. 맑고, 흐리고, 천둥이 치고, 태양이 작열하는 지상의 어지러움을 농부는 가장 기민하게 마주하는 직업인이다. 때로 원수 같고 선물 같은 자연 앞에서 한 알의 사과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의 내력을 공부해야 할 때다. 태양이 우리 모두를 앗아가기 전에.
 

지리산 산촌민박 꽃별길새 블로그에 소개된 산촌민박 전경(https://blog.naver.com/qkqwkdtk). ⓒ 산촌민박 블로그




모두를 살리는 농사를 생각한다 - 17인의 농민이 말하는 기후 위기 시대의 농사

녹색연합, 금창영, 이다예, 이아롬, 황인철 (지은이), 목수책방(2023)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 - 환경운동가 김석봉의 지리산 산촌일기

김석봉 (지은이), 씽크스마트(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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