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석
임응식
이런 상황에서 친일 소설을 써서 기독교인들의 정신에 파고든 작가가 있다. 장편소설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정비석이 바로 그다. 그는 기독교인을 일왕 신도로 바꾸려는 시도를 통해 일제의 편을 들었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데 기여했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폐해도 조장했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용이하게 해주는 부정적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정비석이 비판한 것은 그런 측면이 아니었다. 일제 부역자가 된 그는 제국주의의 모순을 건드릴 수 없었다. 서양 기독교와 한국인들을 떼어놓는 데만 주안점을 뒀을 뿐이다.
친일파 연구의 토대를 닦은 역사학자 임종국(1929~1989)은 <친일문학론>에서 정비석의 1943년 콩트인 <한꺼풀 가면>에 대해 "미국인 선교사들의 위선을 고발"한 글이었다면서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콩트의 배경은 "소화(昭和) 10년"인 1935년이다. 만주사변(1931)을 일으킨 일본이 중일전쟁(1937)으로 나아가는 과도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미국인 선교사 페치프렌은 한국인 교인들로부터 "살아계신 신"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는 1935년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를 충실히 따르던 한국인 목사 최성준은 동행을 자청한다. "신의 나라 아메리카를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여객선에서 페치프렌은 평소처럼 최성준에게 친절을 베푼다. "여전히 신처럼 친절하였다"라고 소설은 말한다. 그런데 하와이에 정박하면서부터 태도가 이상해진다. 최성준에게 짐을 맡기고 혼자만 상륙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선할 때도 최성준을 하인처럼 부린다. 마중 나온 친지들 앞에서 최성준을 가리키며 "이건 조선의 토인인데 내가 거기 있을 때 귀여워해 준 충실한 노예"라고 소개한다.
일제강점 이듬해인 1911년에 의주에서 출생한 정비석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모순을 비판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1929년의 항일투쟁 사건인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생도 사건'으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운동권 학생이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1929년 6월 6일자 <매일신보> 1면 우중단은 이때 검거된 학생 중 하나로 정비석의 본명인 정서죽을 거명했다.
1929년 5월 24일 자 <동아일보> 2면 중간은 사건 가담자들을 "좌경"으로 분류했다. 그해 6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 중상단이 이 학생들의 혐의 중 하나로 "3월 1일 교실에 회합, 조선○○만세 고창"으로 제시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시절에는 '독립'이란 표현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이 시절의 '좌경'이 '독립운동'과 거의 비슷한 표현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독립운동권 학생들이 좌경세력으로 분류된 것은 이들이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연구를 동시에 했기 때문이다.
정비석은 징역 10월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8세 때에 '좌경 사건'에 연루된 것은 그가 세계사적 관점에 입각해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한국 진출을 비판할 지적 여력을 갖고 있었으리라는 판단을 갖게 한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비석 편은 사건 뒤에 그가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의 니혼대학 예과에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니혼대학 본과에 들어간 뒤에는 <프롤레타리아신문>에 작품을 제출해 당선됐다고 알려준다. 제국주의에 대한 학문적 비판이 가장 왕성한 일본에서 보여준 이런 행적은 그가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얼마든지 세련된 비판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도 <한꺼풀 가면> 같은 수준 낮은 콩트를 썼다. 위선자는 기독교뿐 아니라 어느 영역에든 있는 것인데도, 서양 선교사의 위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한국 민중과 기독교를 이간시키려 했다. 제국주의를 까놓고 비판할 수 없는 친일파였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볼 수 있다.
일제 침략 전쟁 찬양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