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소장을 인터뷰하는 윌프레드 버체트.
임재근 제공
'딘 사건'은 한국전쟁을 읽어가면서 기억의 전쟁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음미하게 한다. 딘이 실종된 다음날인 7월 21일 랄프 바르가손 상병이 로켓포팀을 지휘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진술이 보도됐다. 딘과 함께 있던 부관 클라크가 7월 23일 영동에 복귀하면서 그의 실종은 확실시됐다.
미군은 두 달을 지나 9월 28일 대전을 수복했다. 그들은 파괴된 채 남아 있는 인민군의 T34전차에 "7월 20일 딘의 지휘 아래 파괴됨"이라고 페인트 글씨를 남겼다. 모두 네 대 가운데 세 대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미군 장병들은 자연스럽게 승리감과 함께 희생된 것이 확실해 보이는 자신들의 지휘관인 딘 소장을 기렸다.
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조치는 포상이었다. 1951년 1월 미국 최상위의 군사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딘의 부인이 대신 받았다. 포로일 수 있다는 정보가 없지는 않았지만 훈장을 수여했다. 딘을 영웅화함으로써 패배한 전투지만 승리한 전투로 전환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1951년 12월 그가 포로로 생존해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은 머쓱한 상황이 됐다. 패전 책임이 있는 지휘관이지만 실종이 아닌 전사로 간주한듯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상징화했는데, 포로라는 게 확인된 것이다.
딘 소장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가 혼재할 수 있다. 사령관 워커의 명령에 따라 부하들의 더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7월 20일까지 대전에서 버텼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한 24사단은 3개 연대가 연전연패를 했고 그렇게 퇴각하다가 자신은 길을 잃었고, 게다가 적군의 포로가 됐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했거나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희생적이어서 국가가 최고 훈장을 줄 만한 군인일까, 아니면 작전실패를 책임져야 할 지휘관인가. 미군 장성이, 그것도 사단장이 포로가 된 것은 이게 유일하다고 알려졌다. 세계 최강이었던 미군으로서는 패전의 치욕 위에 사단장 포로라는 최악의 치욕을 당한 것이다.
미국은 딘이 포로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후 딘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데서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딘과 같은 날 명예훈장을 받은 리비 병장과 대비된다. 미군은 임진강에 교량을 새로 건설하고는 리비교라고 명명하고 그 옆에 기념비(리비교 남단의 검문소 안쪽에 있다. 외부에서 볼 수는 있지만 영내라 자유롭게 출입할 수는 없다)도 세웠다. 리비는 후퇴 과정에서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해낸 것이 포상의 이유였다.
그러나 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한 딘에게는 리비와 같은 추가적인 명예는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딘을 영웅으로 치켜세웠지만, 포로로 확인된 이후 그의 영웅 서사를 조용히 내린 것은 상식적이다. 딘 자신은 회고록에서 "나무로 만든 훈장이라도 탈 자격이 없다"라고 고백했다. 겸손이 배어있지만 자신에 대한 담담한 평가다. 딘은 자신이 받은 훈장에 대해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승만은 딘 소장이 포로송환으로 귀환하자 그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미국이 딘의 영웅 만들기를 중지했으나 한국은 뒤늦게 영웅 만들기에 나선 셈이다.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은 동맹국의 장성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런데 한발 더 나갔다.
'로켓포를 멘 딘 소장' 장병상은 사실 왜곡
대전전투 30여 년 후인 1981년 대전에 대전전투 전적비를 세우면서 사단장 딘이 어깨에 로켓포를 메고 있는 일개 사수로 만들었던 것이다. 전적비 비문에는 딘이 3.5인치 로켓포로 적군 전차 1대를 직접 파괴하여 아군의 사기를 드높였다고 기록했다.
적의 전차가 눈앞에 보이는 최전선에서 지휘관인 사단장 딘이 로켓포를 직접 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흠이 될 리는 없다. 문제는 그가 로켓포를 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단장이 로켓포를 직접 쐈다는 것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실전에서는 자칫 로켓포 사수까지 하느라 지휘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곡해될 여지도 있다.
전장에서의 지휘관이란 전황이 나쁠수록 더 엄중하다. 그런데 작전의 결과가 패전이었을 때 작전에 투입된 장병이 아닌 지휘관을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 본인이 전사했으면 경우가 다를 수 있다. 전사자에 대한 추모와 합당한 의례를 부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딘은 패전 뒤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극진히 대우한 결과 딘이라는 존재는 본인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더 자랑스러워졌을까. 수사적 과장이나 예술적 표현을 넘어서서 사실의 왜곡이라고 비판을 받으면 애초의 감사의 뜻은 수그러들고 오히려 은연 중에 모욕이 될 수도 있다. 과장이 선을 넘어 왜곡이란 비판을 듣게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과공이 비례가 된 것이다.
전쟁은 당장에 물리력의 충돌이지만 그 후에는 기억의 전쟁이 되어 세상을 뜨겁게 달구기도 한다. 이럴 경우 사실을 왜곡하면 기억을 시도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 일이 될 수 있다. 시장통 사람들도 사석에서 팩트에 어긋나면 신뢰도가 떨어지는데 하물며 국가가 역사를 집단기억으로 형성하려는 공식적인 행위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앞의 글에서 유엔군 '초전'기념관이라는 명칭에 논란이 따라붙으며 추모의 마음에 얕은 스크래치가 생기더니, 이곳 대전 보문산에서는 팩트의 왜곡에 가슴이 답답한 것은, 내가 소심해서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