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황
위키미디어 공용
1895년의 추석을 그렇게 망친 친일파 이두황은 철종 임금 후반기에 한양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두황 편은 "1882년 2월 무과에 급제하고, 3월 친군좌영 초군에 임명되었다"고 알려준다.
24세 때 무관 말단직이 된 그는 그 뒤 고속으로 승진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886년 1월 훈련원 주부를, 1887년 12월 훈련원 첨정을 맡았다"라며 "1889년 9월 흥해군수에 임명"됐다가 곧바로 다른 관직으로 옮겨갔다고 말한다.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인물이 무과 급제 7년 만인 31세 때 잠시나마 지금의 '포항 시장'을 지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894년, 일본군이 자국민 보호와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조선 땅에 무단으로 들어왔다. 한국 역사학계가 '일본 침략'보다는 '일본 파병'이나 '일본군 상륙' 등으로 부르는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어난 일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지위를 높여갔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친일파 99인>에 실린 강창일 교수의 또 다른 글인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받은 친일 무관'은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이 이 땅에서 엉뚱하게도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이두황이 자진해서 일본군에 투항했다고 알려준다. "그는 일단의 조선인 병사를 데리고 일본군 제5사단장 노즈 중장을 찾아가 참전시켜 줄 것을 간청해서 종군하게 되었다"고 이 글은 설명한다.
일본군 자원봉사를 신청한 그는 통역도 해주고 정탐도 해줬다. 청나라 전사자들의 시신을 매장하라는 일본군의 명령을 받고 그 일도 거들었다. 조선의 녹봉을 받는 무관이 독단적으로 '한일 군사협력'에 나섰던 것이다.
이 시기에 그가 벌인 일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반외세 항쟁인 동학혁명을 진압하는 조선군의 양호우선봉장(兩湖右先鋒將)으로도 활약했다. 호남·호서의 동학군을 진압하는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양호우선봉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1894년에 침략한 일본군은 조선 군대를 제압한 뒤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고, 뒤이어 동학군을 초토화시켰다. 이로써 마음 놓고 조선 정국을 장악하게 된 일본은 명성황후와 고종이 이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러시아 쪽을 바라보자 을미사변이라는 초강수를 내놓았다.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경복궁을 침범한 날, 이두황은 일본군을 위해 광화문에서 망을 봐줬다. 그가 망을 봤다는 점은 일본 극우단체 흑룡회가 1966년에 펴낸 <동아 선각지사 기전(記傳)>에서 확인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에 인용된 <동아 선각지사 기전>은 이두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는 제2대대장으로서 광화문을 경위하고 있었는데"라고 말한다. 이날 그는 광화문을 지키다가 친러시아파 연대장인 홍계훈에게 칼을 맞을 뻔했다. 일본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날 광화문 앞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일본이 비호해준다 해도 중전 살해에 가담한 조선 군인이 이 땅에서 무사히 살 수는 없었다. 명성황후의 남편인 고종이 자리를 지키는 한 그랬다. 양력 기준으로 을미사변 3개월 뒤인 1896년 1월 7일, 그는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1년간 계속될 망명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의 일본 생활은 망명객의 생활답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일본을 도왔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일본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꽤 요란스럽게 생활했다.
위 <친일파 99인>은 이두황과 함께 일본에서 생활한 망명객들이 "마치 영웅호걸인 양 활개를 치고 다녔다"라며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이들을 돌보아주고 있던 일본 근대화의 기수 후쿠자와 유키치도 '자기 나라 국모를 죽인 자들이 은인자중하지 않는다'고 질책할 정도였다"고 설명한다. 일본을 움직이는 사상가의 눈에도 꽤 한심하게 비쳤던 것이다.
이두황이 달아난 지 11년 뒤인 1907년에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를 당했다. 이두황은 그 직후에 특별사면을 받고 귀국해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하에 중추원 부찬의, 전북관찰사, 전북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고, 1910년 일제 강점 뒤에 전라북도장관과 전북토지조사위원장 등을 지내다가 1916년에 사망했다.
이두황의 친일 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