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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저런 빛깔과 향을 가질 수 있을까? 여름철 들녘을 거닐 때면 금세 스치기만 해도 진하고 알싸한 향기를 내뿜는 방아(배초향), 고고한 자태로 꽃대를 올리며 생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천경자(경남 진주 금산면 거주, 50)씨는 흐드러지게 핀 방아꽃을 볼 때면 어김없이 '가리장'에 얽힌 추억이 떠오른단다. 가리장은 '가루장'을 경상도식으로 발음한 것.

"가리장은 싱싱한 고둥 맛이 관건이거든요. 갓 잡아 온 고둥을 국 끓여 먹었죠. 원래는 흙을 머금고 있어 따로 해감을 해야 하는데, 배는 고프고, 기다릴 시간이 없잖아요. 그러면 엄마는 꾀를 내서 고둥 끝을 돌로 깨뜨렸어요. 내장을 떼어 내고. 즉석에서 끓여 먹는 거예요."

그에 따르면 귀한 손님이 오는 날, 가족들의 특별 보양식도 가리장이었단다. 평소에는 온 식구가 힘을 합쳐야만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식구들은 저마다 바늘을 들고 삶은 고둥 알을 뺏고, 그 사이 엄마는 담장 밑 방아잎을 훑어다가 걸쭉한 고둥 가리장을 밥상에 올리셨단다.
 
방아향 가득한 가리장을 끓였다
▲ 토속 음식 가리장 방아향 가득한 가리장을 끓였다
ⓒ 진주문화관광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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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보리밥 먹던 시절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인 터였다. 이제까지 단연코 흰쌀밥이 밥상의 주인공이었다면, 이 날 만큼은 가리장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고 만다.

"가리장은 국도 아니고 찌개도 아닌 거죠, 밀가리(밀가루)가 물에 확 퍼지면서 양이 넉넉해지거든요. 그러면 그날은 식구들이 배불리 먹었어요. 숟가락으로 냄비 바닥을 싹싹 긁어먹을 만큼 간이 짭조름해 계속 손이 가거든요. 그러면 어머니는 말씀하셨죠 '아이고, 고마 솥째 다 무삐라.' 그 소리에 다들 한바탕 또 웃고..."

먹거리가 귀한던 시절 가리장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보양식이 되어 주었다.

가리장, 애환을 달래주다 

경남 집현면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는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부모님을 따라 논으로 나섰다. 아버지는 볍씨 싹을 틔워 모판을 만들고 논에 물을 댄다. 손으로 모를 심던 시절, 동네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모를 심었고, 동네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산에 올라 찔레 순을 꺾기도 하고, 도랑가 고둥을 잡기도 한다. 빙글 뱅글 춤추듯 돌아가는 고둥은 흙바닥에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면 아이들은 유심히 지켜보다 그중 한 놈을 손에 잡아든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해가 기울면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땀범벅이 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일을 마친 아낙들도 허리를 숙여 논 고 잡는 풍경이 펼쳐지면 입에서는 절로 '아이고 대다' 탄식이 터지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겨우 식힌다.

그제서야 눈을 들어 들을 살피면 따로 장을 보지 않아도 걱정이 없었다. 사시사철 자연이 내어주는 딱 그 만큼만 거두어 밥상을 차려냈다고.

"그땐 지금처럼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먼저 냉장고를 장만한 이웃집에서 얼음을 얼려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었죠. 무더운 여름을 그런 '정'으로 달래며, 살았던 시절이었어요."

천경자씨는 이날도 오래전 엄마가 차려 준 가리장 밥상을 생각하며 고향에서 따 온 방아잎으로 가리장을 끓였다. 지난해 엄마를 여읜 그는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가리장을 만들곤 한단다.

"저한테 가리장은 '영혼의 음식'이에요. 한 숟갈 먹고 나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평온해지고 그런 음식, 재료가 달라 예전 그 맛은 안 나지만 그래도 언제나 가리장 한 대접 먹고 나면, 엄마가 옆에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엄마에게 직접 가리장 끓이는 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비슷하게라도 끓여 내는 걸 보면.

아마 엄마도 따로 배운 적이 없지만 끓이셨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 시절 엄마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알겠고, 애쓴 세월과 진한 사랑이 느껴져요. 꿈이라도 좋으니 만났으면..."

말끝을 흐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진 그는 고향에서 가져온 노란 호박꽃과 방아꽃으로 단장한 가리장 밥상을 차렸다.

"헛헛하고 외로울 때 방아향 가득한 가리장 만들어 보세요. 갓 지은 쌀밥과 걸쭉한 가리장 한 대접 먹고 나면, 금세 기운이 나거든요."

가리장은 우렁이 대신 다슬기나 참게 등을 재료로 쓰기도 한다. 밀가루 대신 찹쌀가루, 멥쌀가루를 이용하기도 하고, 고추장으로 간을 하기도 한다.

'가리장'은 '가루장'을 경상도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가리장'은 '가루(粉)'와 '장(醬)'의 합성어로 보인다. 가리장만 가지고도 영양보충이 되어 식사대용이 될 수 있는 음식이다. 

덧붙이는 글 | 진주문화관광재단 웹진, 경남 독립언론 <단디뉴스>에도 중복 게재됩니다.


태그:#가리장, #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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