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5 13:48최종 업데이트 24.09.2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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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최근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에서 서울대 입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거주 지역'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대 진학률 격차가 발생하는 원인 중 거주 지역 효과는 92%를 차지하고, 학생의 잠재력 영향은 고작 8%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새롭거나 놀라운 연구 결과는 아니다. 서울대 신입생 중에서 사교육 특구인 강남 3구 출신 학생들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역균형선발(지균)과 같은 여러 제도가 나왔지만 실질적으로 서울의 명문대 진학률 집중을 해소하진 못했다. 오히려 지균으로 뽑힌 학생들을 괄시하거나 조롱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심지어 출신 고등학교를 티셔츠에 새겨 출신지를 구분하는 세태까지 벌어졌다. 서울대 입학뿐이겠는가. 한국 사회 거의 모든 분야는 서울도 모자라 강남이라는 특정 지역에 치우친 듯하다.

서울이 아닌 변방에서 살아가려면 교육, 의료, 문화, 경제 할 것 없이 정말 여러모로 불편하고 힘든 점을 감수해야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선택지를 비교할 새도 없이 어렵더라도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를 선택하는 이유다.

벽이 없는 학교 산티니케탄

인도 산티니케탄 학교 ⓒ EBS


나 역시 대학 생활을 서울에서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학벌 사회를 비판했으나 결과적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을 선택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 생활을 해보니 더 이상 서울에 남을 이유를 찾지 못했고, 대학 4년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고등학교 동창생 중 나만 유일하게 그런 선택을 한 듯했다. 부산으로 돌아간다는 나에게 이해할 수 없다며, 어리석게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다그치듯 이유를 묻던 친구도 있었다.

서울이 비대해지는 문제가 하루 이틀 된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를 좀 다르게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다. 이 책은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의 회고록이다. 책의 원제는 '세계 속의 집(Home in the World)'인데, 이는 시인 타고르의 책 <가정과 세계(Home and the World)>에서 따온 것이다.

타고르가 인도에 세운 산티니케탄 학교에서 어린 시절 10년 동안 공부한 센은 그때의 경험이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산티니케탄 학교는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으로서도 굉장히 선진적인 교육 방식을 채택했다. 체벌을 금지한다거나 시험을 보지 않는 등의 것이 그렇다.

센은 이 학교를 "벽이 없는 학교"로 표현했다. 타고르는 학생들의 사고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 갇히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양한 언어의 문학 작품을 읽고, 시대와 공간의 제약 없이 수많은 사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토론하는 것이 이 학교의 수업이었다. 심지어 실제로 벽이 없는 야외에서 수업했는데, "바깥 세계가 보이고 들리는 와중에도 집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학교에서 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호기심을 가감 없이 수업에서 펼쳤고 친구들, 선생님과 함께 자유롭게 토론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해갔다. 센은 그 어느 것에도 갇히지 않은 채 늘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온전한 자유와 행복을 느꼈다. 타고르가 산티니케탄 학교를 통해 펼치고자 했던 뜻처럼 이성의 역량을 길러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아마르티아 센은 세계 전체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가 머물렀던 모든 곳은 배울 것이 있는 곳, 질문을 던지게 하는 곳,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곳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은 언젠가는 영향을 받을 곳, 혹은 이미 영향을 받은 곳이기에 항상 궁금하고 알고 싶은 곳이다. 어느 한 곳에 대한 강한 애착 대신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다"

2025학년도 대학입학시험전형 수시모집 원서접수를 하루 앞둔 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원 건물에 의대 입시 홍보문이 붙어있다. ⓒ 연합뉴스


상상해보라. 세상을 나의 고향으로 여길 수 있는 자가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말이다. 세상을 나의 고향으로 여길 수 있다면 국가, 종교, 민족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분쟁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심각한 기후위기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빈부격차로 생기는 고통을 해소할 열쇠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 출신인지가 아니라 어떤 인간으로, 어떻게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지를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세상이 자신의 고향인 사람들은 많은 것이 갖추어진 곳보다 도전 과제가 많은 곳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일 테다. 산티니케탄 학교는 생각할 수 있는(이성의 역량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음을 가르친 것이다.

지난 8월 인디고 서원에서 "읽다, 새로운 세계를 열다"를 주제로 국제 문학 포럼을 진행했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참여해 문학의 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세계의 모습을 공유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행사에 참여한 한 고등학생은 이렇게 후기를 남겼다.

"강연을 듣고 질문을 하며,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절대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곳에서 제게 매겨지는 소수점 두 자리의 내신 등급이 지금 무척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더 넓은 세상을 꿈꾸고 그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한 자질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서울을 고향으로 여기고 싶어 하는 사회에 과연 어떤 자유가 가능할까? 세상을 나의 고향으로 여기며, 자신의 고향인 세계를 아름답게 가꾸고 사랑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길러질 수 있는 교육이 하루빨리 가능해지길 꿈꾼다. 이미 120년도 더 전에 산티니케탄에서 가능했던 일이니 불가능하다고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윤영 / <인디고잉> 편집장 ⓒ 이윤영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이윤영은 부산에 위치한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에서 발행하는 인문교양지 <인디고잉>의 편집장입니다. 청소년기부터 인디고 서원에서 활동하며 인문·문화·교육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세계와 소통하는 세계를 꿈꾸는 시민이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 회고록

아마르티아 센 (지은이), 김승진 (옮긴이), 생각의힘(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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