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03 13:29최종 업데이트 24.09.0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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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8일 당시 이지연 통계청 인구총조사과장이 정부세종청사 1공용브리핑실에서 '2021년 인구주택총조사(전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옛날 사람들은 나라님의 존재를 아득히 먼 별세계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금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등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왕이 얼마나 부자인지도 잘 몰랐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엄청난 부자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나라님은 달랐다. 전국적으로 호구는 얼마나 되는지, 장정은 얼마나 되는지, 노비와 머슴(자유민)은 얼마나 되는지, 각 호구의 토지는 얼마나 되는지, 수확량은 얼마나 되는지 등등을 세밀히 살폈다. 세금을 거두고 병력을 징발해 왕조의 간판을 유지해야 하므로, 이런 것들을 항상 체크해야 했다.

방식과 내용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런 조사는 오늘날에도 시행된다. 오늘날에는 국가가 궁금해하는 항목이 훨씬 많아졌다. 전통적인 항목들에 더해, 학교는 어디까지 다녔는지, 결혼은 했는지, 어떤 주택에 사는지, 방은 몇 개나 되는지까지도 세밀하게 캐묻는다.

나라님이 백성들에 대해 더욱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쪽으로 국민과 국가의 관계는 흘러가고 있다. 개인주의 추세에 따라 개인들이 감추는 것이 많아질수록, 국가는 5년 혹은 10년마다 더욱더 많은 항목을 적은 질문지를 꺼내놓는다.

군사 경험, 징용 경험 기재하게 한 인구조사

1948년에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도 국민들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런 욕망이 1949년 1월 27일의 인구조사법 제정과 5월 1일의 인구조사로 이어졌다.

이날 <동아일보> 사설은 "금일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최초의 인구조사가 전국에 걸쳐 일제히 실시되는 날"이라고 한 뒤 95.5%의 투표율을 기록한 전년도 5·10 총선을 거론하면서 "민국에 생(生)을 향유한 자는 수모(誰某)를 막론하고 5·10선거에 참가하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참여할 것이 독려된 이 인구조사에는 '나라님'의 관심사도 당연히 반영됐지만, '백성'들의 요구 사항도 특별히 투영됐다. 인구조사법이 제정된 뒤인 그해 2월 24일 자 <동아일보>는 인구조사에서 다룰 항목을 이렇게 예고했다.

(1) 성명, (2) 가구(기사에는 '국가'로 오기)에 있어서의 지위, (3) 생년월일, (4) 성별, (5) 배우 관계, (6) 직업[부(附) 특수기능], (7) 학력, (8) 해방 당시 거주지, (9) 본적, (10) 군사 경험, (11) 징용 경험.

가구 내의 지위가 가구주인지 장남인지, 결혼 관계는 어떠한지, 직업은 어떠한지, 직업과 별도로 특수 기술은 있는지 등등을 묻는 항목과 더불어 "해방 당시 거주지"도 기입하도록 했다. 8·15 뒤에 귀국한 인구의 비중이 높았던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다.

국민들의 요구 사항이 특별히 반영됐다고 말한 것은 10번과 11번 때문이다. 두 항목은 당시의 정부도 알아야 했던 것이지만,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특별히 알리고 싶어 했던 사항이다. 어느 나라 군대에 언제 있었고 계급과 병과는 무엇이었는지와 함께 강제징용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기간을 조사지에 기입하도록 했다. 대일 배상요구에 필수적인 강제징병과 강제징용 피해에 관한 항목을 적어 내도록 했던 것이다.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 앞에 있는 이승만·트루먼 동상조정훈

김성수를 위시한 친일세력이 이승만을 앞세워 1948년 7월 20일의 제1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뒤이긴 했지만, 국민들의 친일청산 요구가 대단할 때였다. 이를 반영해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고(1948.9.7.) 국회 반민특위가 대표적 친일파 박흥식 등을 체포해(1949.1.8.)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에 인구조사법이 제정되고 조사 항목이 정해졌다.

친일세력이 정부를 장악한 상태에서도 대일 배상요구에 관한 항목이 인구조사에 포함된 데는 이런 정세도 큰몫을 했다. 이 시기의 '나라님'은 그 같은 국민정서 때문에라도 국민들이 일본군에 끌려갔다 왔는지, 전범기업에 끌려갔다 왔는지를 궁금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이승만 자신은 궁금하지 않았을지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에 떠밀려 궁금증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랬던 것이, 친일청산이 무력화되고 뒤이어 한국전쟁이 벌어진 뒤에는 확 달라졌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제1회 간이총인구조사라는 명칭으로 실시된 1955년 인구조사다. 이 조사에서는 대일 배상과 관련된 항목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난 6월 <사학연구> 제154호에 수록된 김수향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논문 '해방 이후~1950년대 인구조사의 변화와 그 역사적 의미'는 1955년 조사에서 '자기 집에 사는지, 셋방에 사는지', '전업농인지 겸업농인지' 등을 묻는 항목들이 추가된 반면, "한국의 인구센서스 역사상 1949년 조사에만 존재했던 군사 경험, 징용 경험"은 삭제됐다고 기술한다.

1955년 조사에서 강제징병·강제징용에 관한 항목이 빠진 것은 국가가 이에 관해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승만정권과 친일보수세력이 연대해 친일청산 요구를 짓누른 데다가 일본의 지위가 전범국에서 미국 동맹국으로 격상된 상황 변화 등에 따른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국민들의 식민지배 피해, 궁금해하지 않은 이승만 정권

2023년 7월 4일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을 상대로 공탁 절차를 개시한 가운데, 외교부앞에서 ‘대일굴욕외교, 역사정의-피해자 인권 짓밟은 윤석열 정부 규탄 - 공탁 철회 긴급기자회견’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최로 열렸다.권우성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은 해방 80년을 1년 앞둔 지금까지도 법원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이 일제에 당한 피해를 대한민국 국가에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두드리고 있다. 이는 1955년 인구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승만 정권이 이 문제에 대한 국가의 관심도를 현저히 낮췄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일제 때 당한 피해를 국가가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상황이 이미 이때 생겼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의 인구조사가 전부 다 퇴행적이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비교해 나아진 점도 있었다.

일제 국가권력은 인구조사와 비슷한 호구조사를 통해 한국인들이 반일파인지 친일파인지까지도 세세히 알아냈다. 이런 조사에 경찰력까지 동원했을 정도다.

2021년 <한국근현대사연구> 제96집에 실린 이명종 강릉원주대 연구교수의 논문 '식민지 대만과 조선의 호구조사규정 제도 비교연구'는 "호구조사규정에 의하여 식민지 대만과 조선에서는 1개월, 3개월, 또는 6개월 간격으로 모든 주민들에 대하여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호구조사부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행정 시스템을 가동"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행정구역을 단위로 해서 주민의 가족관계, 재산 정도, 직업 여부, 사상 경향, 성품과 행실, 병역관계 등을 조사하여 호구조사부에 기재하고 관리하여 이를 경찰상 필요한 자료로 삼았던 것이다."

일제가 확인하고자 했던 "사상 경향"은 독립운동 성향 혹은 반일·친일 성향의 다른 말이다.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에 "사상 경향" 같은 우회적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력을 동원해 이런 사실을 1개월에서 6개월 간격으로 조사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일제 경찰이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성향에 더해 성품과 행실까지 세밀히 조사하는 억압적인 행태를 보인 것은 일제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한층 명확히 해준다.

이승만 시기에는 이런 것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 시기의 인구조사는 일제 식민지배의 폭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주는 측면도 있었다.

그처럼 일제보다 나아진 면도 있지만, 1950년대의 인구조사는 국민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한 대한민국 국가의 관심이 현저히 약해진 이승만 정권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정권이 외형상으로는 소리 높여 반일을 외쳤지만 그것이 진심을 담지 않은 것이었다는 점이 인구조사로도 나타난 것이다.

'굴욕적인 한일관계' 하면 박정희 정권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런 흐름은 이미 이승만 정권 때부터 형성됐다. 1965년 한일협정 이전 전부터 이승만 정권은 국민들의 식민지배 피해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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