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13 10:09최종 업데이트 24.08.1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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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기자회견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보훈청에서 자신의 저서를 보여주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이정민
 
극우적인 뉴라이트 역사관으로 인해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2022년 저서인 <끝나야 할 역사전쟁, 건국과 친일 논쟁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거듭거듭 들어 올리고 "이 책을 읽어보라"면서 자신의 지론을 내세웠다.

그가 모두발언에서 강조한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건국 시점이다. 이후 질의응답에서도 이 부분이 크게 논란이 됐다. 모두발언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뒤 저서를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학교 신용하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은 어느 한 시점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역사적 과정으로 봐야만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시작되어 1948년 정부수립으로 완성되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견해이고 저의 입장은 신용하 교수와 동일하다고 하는 것을 이 책 속에서 자세히 설명을 해놓고 있습니다."

뉴라이트의 대표주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반일종족주의>에서 신용하 교수를 신랄히 비판했다. 이영훈 교수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한국 토지의 40% 이상을 수탈했다는 신용하 교수 등의 연구 결과를 거론하면서 "어느 연구자도 이 40%라는 수치를 증명한 적이 없습니다"라며 "검인정이나 국정이나 교과서를 쓴 역사학자들이 아무렇게 지어낸 수치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김형석 관장은 뉴라이트로부터 그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받는 신용하 교수가 자신의 '동지'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일반 뉴라이트처럼 '1948년에 건국됐다'고 하지 않고, 신용하 교수처럼 '1919년에 시작된 건국이 1948년에 완성됐다'고 말한다고 주장했다.

신용하 교수, 임시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 성립

신용하 교수가 1919년과 1948년을 함께 거론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발언의 취지는 달랐다. 2017년 8월 29일 자 <조선일보> 인터뷰 '대한민국 건국, 1919년 시작해 1948년 완성'에 따르면, 신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이 이뤄졌다는 도산 안창호의 말을 인용하면서 임시정부 주역들이 '1919년 건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은 이렇다.

"초기 임정의 핵심 인물인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20년 1월 '독립운동의 6대 사업과 6대 방략'이란 연설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1919년 건국론'을 따르면, 우리 민족이 주권을 잃었던 기간이 9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역사의 연속성 정립에도 유리하다."

신 교수는 임시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이 성립됐다는 인식을 표시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한성 임시정부, 러시아주재 임시정부를 통합한 1919년 9월의 임시정부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전 세계의 한민족은 이를 정부로 생각했다. 또 국내의 국민과 연결하는 연통제·교통국 등의 제도를 확립하고 국민개납(皆納)주의, 국민개병주의, 국민개업(皆業)주의를 명시하면서 통치권도 일부 행사했다. 손문의 광동정부, 레닌의 소련정부, 에스토니아로부터 승인도 받았다."

국민이 누구나 세금 내고 누구나 군대 가고 누구나 직업 갖는 시스템을 지향한 임시정부가 비록 '통치권의 일부'밖에 행사하지 못했지만 "국가 건설의 분명한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이 인터뷰에서 나온 신용하 교수의 언급이다.

이에 반해 김형석 관장은 임시정부가 기본적인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다음날인 13일 아침 블로그에 공개한 모두발언 원문에서 그는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을 받는 기준은 1933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체결된 '국가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협약'에 규정된 국민·영토·정부·주권의 네 가지 요소입니다"라며 "이에 비추어 대한민국이 건국을 완성한 것은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라고 말했다.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이렇게 표시한 것이다.

'1948년에 건국됐다'와 '1948년에 건국이 완성됐다'

신용하 교수는 임시정부가 역량의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정부의 자격을 갖췄다고 말한 반면, 김형석 관장은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형석 관장은 "저의 입장은 신용하 교수와 동일"하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전혀 딴판이다.

김형석 관장은 1919년과 1948년이라는 두 개의 연도를 제시하면서 후자에 방점을 찍는다. 신용하 교수는 정반대다. 신 교수는 1919년에 방점을 찍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1919년 임시정부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 문제는 통일 한국의 정통성이란 관점에서도 접근해야 한다. 국호·헌법 등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정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은 장차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신용하 교수가 1919년과 1948년을 함께 언급한 것은 1919년에 대한민국이 성립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불완전했을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성립했다는 김형석 관장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김형석 관장은 신용하 교수의 언급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바로 저의 견해"라고 했지만 그의 견해는 신 교수와 달랐다. 그가 신용하 교수를 거론하는 것이나 '1919년에 시작된'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건국절 반대론자들의 비판을 의식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뉴라이트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1948년에 두는 것은 1919년이 대한민국의 기초로 인정되는 게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자주독립정신이 대한민국의 이념이 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1919년을 앞에 달기는 하지만 김형석 관장도 1948년 건국을 인정한다. 여느 뉴라이트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위 저서가 나오기 얼마 전인 2022년 2월 21일 블로그에 쓴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되었나?'에서 그는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것이 맞다"고 한 뒤 다음 문단에서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건국이 완성된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그가 '1948년에 건국됐다'는 말과 '1948년에 건국이 완성됐다'는 말을 똑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8년에 건국이 완성됐다' 앞에 '1919년에 시작된'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반대론자들을 의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혼란상을 반영하는 징표

이완용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친일세력은 1919년 3·1운동을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이것이 항일운동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민들의 운동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3·1운동은 제국주의에 빌붙어 기득권을 유지하는 친일보수세력의 존립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일제와 손잡고 억눌렀던 평민들이 세상을 뒤바꾸려 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이 운동에 대한 친일세력의 반발을 추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비호가 있었기에 3·1운동에 대한 공개적 비판이 가능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친일적인 정권하에서도 그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대중이 폭발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3·1운동을 정면으로 건드리지 못하고 주변을 툭툭 치는 일들이 일어났다. 건국절 논쟁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김형석 관장도 대놓고 3·1운동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3·1운동의 주변을 툭툭 치는 일은 하고 있다.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1919년에 두는데도 그가 1948년에 방점을 찍는 것은 3·1운동에 대한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2022년 3월 1일 블로그에 쓴 '3·1절에 유관순을 미친년이라 부르는 그들'에서 김형석 관장은 정호승 시인의 '유관순'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논란을 자초한 이병훈 민주당 의원을 비판했다. 그는 "유관순이 누구인가. 유관순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라고 말했다.

그런 뒤 "이렇게 애국애족의 순고한 삶을 살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를 온갖 더러운 표현으로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시를 써서 모욕하고, 또 그런 내용을 3·1절에 SNS로 퍼트리는 자 그들은 누구인가?"라고 나무랐다. 그러면서 "그들이야말로 애국심과 항일정신을 내세우며 역사를 왜곡하는 진짜 친일파다"라며 '항일정신을 내세우는' 반일 진보진영을 꾸짖었다.

이런 글을 보면 그가 3·1운동을 옹호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3·1운동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1948년 건국설을 지지한다는 점은 해마다 3월 1일에 그의 기분이 맑을지 흐릴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이런 궁금증을 받는 인물이 독립기념관장실에 앉아 있다는 것은 세상의 혼란상을 반영하는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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