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26 11:52최종 업데이트 24.07.2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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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철을 맞아 친환경 여행, 도시 탐방, 반려동물과 함께 보내는 휴가, 오토바이 여행, 숨겨진 명소 등 다양한 형태의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국민휴가위원회'가 나섭니다. 무더위와 고물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휴가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합니다. [편집자말]
난 해외여행을 좋아했다. 세상은 놀거리가 무궁무진했다. 미국의 스카이다이빙, 이탈리아의 곤돌라, 라오스의 카약 등등. 체험을 위해 여행을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경험에 돈을 아끼지 않는 MZ(1980~2000년대 출생)다. 

꺾일 줄 몰랐던 내 열정도 코로나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해외여행 길이 막혔다. 와중에 인공지능(AI)이 나타났다. 여행을 위해 공부하던 재미도 사라졌다. 일부러 외워가던 외국어는 AI 통역을 이용하면 되고, 어떤 테마로 어떻게 동선을 짜면 좋을지도 생성형 AI인 챗지피티에 물어보면 된다. 굳이 실수해 가며 경험을 쌓던 내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여행 슬럼프가 시작됐다.


전과 달리 회사와 집만 반복했다. 보다 못한 아빠가 "주말마다 국내를 돌아보는 것은 어때?"라며 권했다. 국내 여행은 이미 부모님과 지겹도록 많이 갔다. 초등학생 때는 방학만 되면 현장체험 학습서를 냈고, 다 커서도 알바를 빼고 주말마다 안 간 섬이 없다. 역사학도인 아빠의 문화재 설명을 귀 아프게 들은 것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아빠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엄마아빠 없이 말이야. 너 혼자 가든지, 또래 친구들이랑 가든지." 혼자? 엄마아빠가 원하는 대로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동선을 짜고 운전하고 밥값 내고 숙소를 정하라고? 하긴, 해외여행도 혼자 다니는데 국내라고 못 다닐 것 없다.

눈이 서서히 반짝였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켠다. 여권과 캐리어는 없다. 하지만 카메라와 고프로는 여전히 함께다. 난 여행 슬럼프를 깨기 위해 길을 나섰다.

[충남 부여] 껍데기는 없는 알맹이의 현장
 

국립부여박물관 로비 ⓒ 정누리


첫째는 충청남도 부여다. 수도권에서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좋다. 고속도로도 뻥 뚫린다. 안개 자욱한 논밭을 통과한다. 난 해외여행을 가면 항상 박물관에 들렀다. 종일 문화재를 보며 상상하는 것이 내 즐거움이다. 이곳에도 박물관이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다. 부여 사람들이 다 여기로 온 것 같다.

여기서 첫째로 놀란다. 갑자기 안내방송이 나온다. "5분 뒤 백제금동대향로 레이저 쇼가 펼쳐집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돌덩이 하나 덩그러니 서 있는 로비에서 무슨 쇼가 펼쳐진다고? 무리에 섞여 바닥에 앉는다. 이윽고 천장 틈새가 움직이더니 빛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둘째로 놀란다. 암실이 되자, 천장에 붙어있던 몇 대의 빔프로젝터가 작동하면서 로비가 상영관이 된다.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문양들을 소개한다. "물고기, 사람 얼굴을 한 새, 코끼리를 탄 사람!" 아래에 뜨는 글자를 아이들이 외친다. 쇼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난 라스베이거스 오쇼를 봤을 때의 감정으로 얼떨떨하게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실물 금동대향로를 보러 박물관 안쪽으로 들어가고 없다. 나도 따라간다. 저 멀리 빛나는 금동대향로가 있다. 탄성이 나온다. 머릿속에 이 조형물 제작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흙으로 형상을 만들고, 밀랍을 5~6mm 두께로 바르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는다. 역사학도인 아빠가 지겹게 말하던 과정인데 왜 이제 와서 이해되는 것일까. 내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열정적인 해설사께서 사람들을 이끌고 금동대향로에 대해 설명한다. 이것이 깨끗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진흙에 묻혀 산소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1993년에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 내 생각엔 부여 자체가 금동대향로 같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아 깨끗한 곳이 아직도 넘친다. 내가 부여를 만난 것도 여행 슬럼프가 가져다준 '우연'이리라.

다음날 신동엽 작가 생가에 들렀다. 요즘은 신동엽 하면 개그맨부터 떠올리지만, 1960년대만 해도 호리호리한 체격과는 달리 매번 파격적인 민중 시를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작가가 있다고 했다. 시 '껍데기는 가라'는 나도 잘 안다.

작은 초가집 앞에 도착했다. 햇빛이 사방에서 내리쬐어 작은 힘이 느껴진다. 남의 집 문지방을 넘듯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작은 방 두 칸의 실내가 우리 할아버지 살던 곳과 다를 바 없다. 신동엽 시인이 살아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나오는 길에 처마 아래 글귀를 발견한다.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신동엽 시인의 부인인 인병선 여사가 쓴 글이라고 한다.

옆 신동엽 문학관에는 카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어른들이 보인다. 손님이 들어오면 데스크 직원은 꾸벅 인사하고 다시 자기 할 일을 한다. 방문객은 시인의 생애와 편지를 읽고 조용히 걷다가 길을 나선다. 화려한 문패도, 요란한 음악도 없다. 그저 일상을 살아간다. 그야말로 껍데기는 없는 알맹이의 현장이었다.

[부산] 한국의 정이 섞여 있는 바캉스 풍경
 

케이크 만들기 ⓒ 정누리


둘째는 부산이다. 난 처음으로 부산에서 에어비앤비에 묵었다. 원래 같으면 콘도나 리조트를 잡았을 테다. 취사를 싫어하고 일반 가정집에 대한 낯섦이 있는 부모님을 모시고 에어비앤비는 좀 무리다. 하지만 이번엔 제약이 없다. 난 대중교통으로 왔으니 주차 걱정도 없고 취사도 스스로 할 수 있으니 조금만 번거로우면 훨씬 좋은 풍경과 체험을 할 수 있다.

이색 체험으로 무얼 할까. 케이크 만들기 원데이클래스를 신청했다. 2인 11만 원이다. 부산까지 가서 웬 케이크 만들기인가 싶지만, 내 로망이었던 빈티지 디자인의 케이크 가게가 서면에 있었다. 재료를 아끼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가르쳐주는 강사님을 따르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쨍쨍한 색감의 케이크가 바다의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난다. 회나 새우만 떠오르던 부산에 달달한 이미지가 입혀졌다. 여행지의 색깔은 내가 덧입히기 나름이다.
 

드론쇼 ⓒ 정누리


돌아오는 길, 광안리에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바닷가 한 켠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영화를 보고 있고, 한쪽에서는 주말 드론쇼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있다. 바다에는 1만 5000원이면 탈 수 있는 요트들이 쇼를 기다리고 있다. 남은 물량을 다 쓰려는 듯 작은 폭죽을 넉넉하게 쏘아 올린다. 미묘하게 한국의 정이 섞여 있는 바캉스 풍경이다.

드론 쇼가 시작된다. 8000대의 드론이 바삐 움직이며 광안대교, 용, 연꽃 등을 하늘에 띄운다. 어릴 적 아빠 옆에 서서 하늘을 날고 있는 커다란 연들을 보던 것이 생각난다. 해변에서는 여럿이 삼삼오오 모여 김광석 노래를 부른다. 누가 통기타를 치면서 버스킹을 하고 있나 보다. 이게 5060 엠티인지, 2030 핫플레이스인지. 기분 좋은 웃음이 난다. 평소라면 소음으로 느꼈을지도 모를 노랫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그때 난 내가 완전히 여행에 몰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부도] 생명력이 넘친다
 

제부도 ⓒ 정누리

 
끝으로 제부도다. 아빠의 추천으로 다녀온 이곳에는 갯벌 위를 다니는 서해랑 케이블카가 있다. MZ가 좋아하는 인생네컷 사진기도 있다. 제부도 테마 배경도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제부랜드다. 제부도에 무려 놀이공원이 있다.

아담한 놀이기구 몇 개가 보인다. 자유이용권이 아니라 기구 하나당 탑승권을 끊는다. 어째 어른들이 더 들뜬 듯하다. 바이킹은 크기는 작지만 각도는 내가 타본 것 중에 가장 높이 올라간다. 하와이의 산타모니카 놀이공원 못지않다. 고프로로 이곳저곳을 찍고 나온다.

시간을 조금 때우고자 카페에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옆 테이블 할머니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킨다. 사장님이 손사래 치며 "이제 곧 물 때거든요. 좀 있다 나가셔요." 길이 잠겨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AI니 뭐니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세상에 안 되는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제약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내 맘을 편안케 한다.

나도 핑계 삼아 좀 더 카페에 앉아 있는다. 참새가 실내에 들어왔다. 남의 사업장에 들어와 놓고도 당당하다. 이윽고 만조 시간은 상관없다는 듯 창문을 빠져나간다. 이 섬은 아직도 생명력이 넘친다. 새도, 사람도, 바닷물도 쉴 틈 없이 들른다. 땅이 비옥해진다.
 

여행 ⓒ 정누리


돌아와서 엑셀, 사진, 영상을 정리했다. 하나의 가이드북 파일이 나왔다. 휴가 장소를 고민하는 친구들을 위해 나눠준다. 해외 여행 정보는 많은데, 20대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국내 여행 정보는 의외로 별로 없다. MZ에게 있어 여행은 '보는' 것을 넘어 '뽑아내는' 과정이다.

바다에서 일일 야외요가를 체험하기도 하고 민박집에서 홈파티를 열기도 한다. 경주 신라한복을 입기도 하고 강촌의 안 쓰는 철로로 만든 레일바이크도 타본다. 고성 구석에 있는 초콜릿 공장까지 찾아가기도 한다. 핫플레이스가 없으면 내가 직접 만들어낸다.

이제 알겠다. 난 '내가 선택한' 여행을 사랑한다. 그 길에 애정이 솟는다. 해외, 국내는 중요치 않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여행 슬럼프는 끝났다. 아직 구글 드라이브에는 편집하지 못한 사진과 영상이 한가득이다. 이것을 다 정리해야만 나의 여행은 온전히 끝날 것이다. 그때까지 난 휴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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