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10 16:03최종 업데이트 24.06.1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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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누군가 제게 했던 질문입니다.

"가죽공예, 도자기 굽기, 캘리그래피를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원데이 클래스나 세분화된 전문 아카데미를 운영하는데, 펜닥터님은 왜 만년필 수리에 관한 강좌를 열지 않나요? 저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꼭 참여해보고 싶어요."


"안 그래도 수리 강좌 문의하는 분들이 꽤 있어 저도 생각이 많았어요.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수강생이 원하는 날에 맞춰 개별 과외 형식으로 진행하면 어떨까.. 바쁜 세상이니 만년필에 관한 역사적인 이야기는 배제하고, 수리에 관한 실질적인 내용만 실습 위주로 꾸려보면 좋겠다.. 무엇보다 아직 국내에 이런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곳이 없으니,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겠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일이 많아져 시간 내기가 빠듯해요. 당장은 진행할 만한 공간도 없고요. "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어요. 제 주변에도 만년필 쓰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요. 저만해도 회사 동료들이나 친구에게 축하할 일이 생기면 만년필을 선물하거든요. 금액대가 몇 만원 선부터 시작해 크게 부담스럽지 않고, 또 만년필은 건네면서 덕담을 얹기 좋더라고요. 제가 만년필 좋아한다는 걸 아는 지인들이 선물해 주기도 해 어느새 펜이 꽤 늘었어요. 그런데 만년필이란 게 참 묘해요. 제가 험하게 다루지 않았는데도 가끔 말썽을 부리더라고요?

내 펜이 심하게 손상되면 어차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지요. 또 하루 듣고 배운다고 바로 수리 능력자가 될 거라 기대하지도 않아요. 그저 나름대로 아껴온 내 펜이 갑자기 생떼를 쓰는 이유가 뭔지라도 속시원히 알았으면 싶고, 경미한 단차 같은 가벼운 증상이 있을 때 조치할 실력만 돼도 참 좋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이 없더라고요. 아마 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예요. 내가 원하는 날에 일대일 지도를 받을 수 있다니 정말 좋아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분명 작업실 내는 날이 올테니, 그때가 되면 꼭 연락주세요."
 

"기운 나는 덕담 주셔서 참 고마워요. 더 힘내야겠단 생각이 절로 들어요. 그런 날이 오면 잊지 않고 소식 전할게요. 신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 펜수리 강좌를 요청하는 분들이 있으면 저는 늘 이런 식의 답변을 해왔습니다.

예정에 없던 작업실 개소 

그런데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수리할 펜이 점차 늘어나 발 디딜 틈이 없어지고 별도로 조용히 글을 쓸 공간도 필요해, 예정에 없던 작업실을 지난 4월 내게 되었습니다. 

작업실치곤 아담하지만, 여태 안방에 딸린 한 평 남짓 드레스룸에서 지내온 제게는 차고 넘칩니다. 어차피 작업실을 냈으니 테이블 하나만 더 놓으면 수리 강좌가 가능하겠다 싶었고, 그렇게 머릿속에 그린 그림대로 공간을 꾸몄습니다. 작업실 위치는 경기도 김포입니다. 
 

새롭게 꾸민 만년필 수리공의 작업실입니다. ⓒ 김덕래

 
여태까지도 과분하다 싶을 정도의 관심과 신뢰를 받았는데, 2022년 책 출간(<제 만년필 좀 살려주시겠습니까?>) 이후 감사할 일들이 도처에서 생겨났습니다. 이 일을 하기 전엔 내가 남들 앞에서 강연을 할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방송에 출연하는 건 더더욱 남의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관심을 받는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앞날을 예측하기 힘들 만큼 첨단화 돼가는 오늘을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이 곧 돈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되다 보니, 산업 전반에 걸쳐 수리보단 교체 위주의 정책을 펼치는 분야가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고장난 부위를 고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지 예측하기는 힘드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부속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작업에는 수치화된 자료를 대입할 수 있습니다. 작업자의 시간당 공임에 소요시간을 곱하면 수리 비용이 나옵니다. 그러니 전자를 고집하는 것보다 후자를 택하는 것이 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시간은 견줄 대상조차 찾기 힘든, 빼어나게 유한한 자원이니까요.

만년필 수리는 소수의 전문가들만 할 수 있는 특수한 작업이 아닙니다. 살려내는 방법을 먼저 익히고, 거기에 끈기를 보태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운전을 해본 적이 없어 액셀과 브레이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의 눈에, 능숙하게 차를 모는 운전자들이 대단해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어떤 조작을 해야 차에 시동이 걸리고, 달릴 때와 멈출 때 어느 페달을 밟아야 하는지 알면 누구나 차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론 능숙해지기 위해선 도로에 나가 자주 운전을 해야만 합니다. 차를 모는 방법을 안다는 말이, 그날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만년필 수리도 이와 비슷합니다.

펜수리가 어렵지 않은 이유
 

만년필 수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 김덕래

 
내연기관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의 개수가 대략 2~3만여 개 정도라 합니다. 상대적으로 현저히 적은 부품이 쓰이는 전기 자동차더라도 이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부속이 필요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어마어마하게 정밀하고 복잡한 도구인데, 대부분의 성인은 어렵지 않게 몰고 다닙니다.

이에 비하면 만년필 한 자루에 쓰이는 부속의 수는 말하기 민망할 만큼 적습니다. 펜수리에 자신감을 가져도 좋은 이유입니다.

운전을 조심히 하고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는데도 자동차의 성능이 널을 뛰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람도 건강검진을 빼먹지 않고 제때 하면 병이 커지기 전에 미리 잡아낼 수 있지요. 만년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기어를 어떻게 넣어야 차가 앞으로 혹은 뒤로 가는지, 어떤 페달을 밟아야 차가 움직이거나 서는지 여부는 나와 자동차 사이의 최소한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면 차는 내 뜻대로 움직입니다. 자동차는 정기적으로 소모품을 교환하는 정도의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만년필은 나름의 관리법만 알면 어떤 부속도 교체할 일이 없습니다. 연료를 넣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자동차는 없고, 음식을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저 잉크만 채워주면 평생토록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필기구가 만년필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손에 쥐고 펜촉을 종이에 댄 상태로 쓰는 필기구다 보니, 사용자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컨디션이 크게 달라집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지만 않으면 펜에 심각한 탈이 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자잘한 문제는 언제든 생길 수 있습니다.

운전자들 중에도 비가 오는 날 앞유리에 낀 습기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년필이 망가져 사용할 수 없는 정도의 상태에 한참 못 미치는, 이를테면 펜이 경미한 수준의 투정을 부리는 경우더라도 어딜 어떻게 손대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오면 인상만 찡그리게 됩니다.

"나는 만년필을 좋아해 벌써 수십 년째 사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만년필 수리에 대해선 아예 몰라요. 그러니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또 당신의 글은 내 정서와 잘 맞아 편하게 읽혀 좋아요. 글 쓰는 만년필 수리공에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아 호號를 지어 보내요. 인필仁筆, 만년필 고치는 손으로 쓰는 그 글의 온기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가닿기를 바라요."

벌써 몇해 전 받은 편지와 거기 딸려있던 선물(족자)인데, 한 평 작업실엔 도저히 걸 곳이 없어 간직만 해왔습니다. 이번에 작업실을 내며 볕 잘 드는 베란다 한쪽 벽면에 걸었습니다. 작업실이 동향이라 아침 일찍부터 오전 내내 베란다가 눈부십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구칩니다.
 

베란다 한쪽엔 호號 인필仁筆이 담긴 족자가 있습니다. ⓒ 김덕래

 
만년필을 쓰다 실수로 떨어뜨리면 높은 확률로 펜촉에 문제가 생깁니니다만, 실제 펜보다 떨군 사람의 마음에 더 깊은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소중한 이가 건네준 펜일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만년필 수리는 망가져 쓸모가 없어진 펜의 쓰임새를 다시 끌어올리는 여정입니다만, 쓰는 이의 다친 마음이 흉지지 않게 보듬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년필을 쥐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사람이니까요. 그런 견지에서 보면 펜수리 강좌는 마음수련과도 맥이 닿아있습니다.

자녀나 지인과 함께 오는 분들을 고려해, 복층인 2층은 휴식공간으로 꾸몄습니다. 미니 서재를 겸해 다용도로 씁니다. 일하다 잠시 쉴 때 제가 머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2층은 방문객이 사용할 미니 서재 겸 휴식공간입니다. ⓒ 김덕래

  
배우에게 연기할 무대가 주어진 것처럼,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 기쁩니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될수록 아날로그 역시 더 주목받게 될 겁니다. 일단 사람의 몸 자체부터가 디지털이 아니니까요. 아날로그 필기구의 정점에 만년필이 있습니다. 글 쓰는 만년필 수리공의 작업실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덧붙이는 글 관심있는 분들은 제 블로그로 오시면 추가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https://blog.naver.com/driftk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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