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시골을 살리는 작은 학교>
남해의 봄날
마침 서하초가 '광역통학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학생 수가 100명에 달하는 이웃 안의면의 안의초등학교 아이들도 서하초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신 교장은 이 기회를 활용해 관내 귀촌·귀농 학부모들에게 설명회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판을 키운 건 장원 소장이었다. 10여 년 전 귀촌한 농촌 활동가인 장 소장은 학부모들에게 일자리와 집을 제공할 수 있다면 서울에서도 오려는 이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함양군 내에서 설명회를 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역 학교끼리 제로섬 게임이 될 뿐이니까요... 할 거면 전국을 대상으로 학교 살리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하와 같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 하는, 귀농·귀촌을 꿈꾸는 도시 학부모들의 이목을 충분히 끌 수 있을 거라 확신했어요." - 장원 소장 (40쪽)
둘은 함께 할 관계자들부터 모았다. 이주 가족들이 살 집과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함양군의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야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둘은 서하초 교직원과 학부모는 물론, 총동창회, 서하면 향우회, 함양교육지원청, 함양군청, 함양군의회, 교육장, 군수, 군의원, 면장 등 닥치는 대로 만나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처음에는 모두 믿지 않는 분위기였어요... '국가나 지자체에서도 못하는데, 대체 일자리와 집을 어떻게 준다는 거야'라는 반응이 많았죠." - 장원 소장 (55쪽)
2019년 11월 27일 마침내 서하초에서 첫 모임이 열렸다. 다행히 긴 논의 끝에 그날 '학생모심위원회'가 꾸려졌고, 12월 19일 전국 설명회를 열기로 마음을 모았다. 이제 남은 일은 살 집과 일자리를 구하는 것. 학교 교직원들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빈집을 찾았고, 마을 주민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렇게 비어있던 마을회관을 비롯한 전셋집 7채를 마련할 수 있었고, 1년에 200만 원 정도만 내면 살 수 있도록 했다.
일자리를 찾는 일은 군청이 맡았다. 마침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전기차 생산업체 에디슨모터스가 이주 학부모들을 우선 채용하겠다며 나섰다. 한두 주만 배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노동직에 월 250만 원을 주기로 약속했다.
학교에선 학생을 위한 혁신적 교육 프로그램과 여건을 마련했다. 주 1회 영어 특성화 방과후 수업, 원어민 영어 교육, 전교생 해외 어학연수, 전교생 장학금 제공 등이 그것이다. 필요한 돈은 학생모심위원회가 모으기로 했다. 목표는 1억 원. 장 소장이 먼저 마중물로 열 달 동안 100만 원씩을 내기로 하자 지역민은 물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졸업생들도 힘을 보탰다.
"농협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꾸깃꾸깃한 만 원짜리 지폐를 차곡차곡 펴서 ATM기에 넣으시더라구요. "할아버지 뭐 하세요"하고 여쭤봤더니, 서하초 기금을 넣는다고 하시더군요. 이 학교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 이주 학부모 승우 씨 (104쪽)
그해 12월 19일 설명회 소식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설명회에는 200여 명이 참석했고, 거의 모든 중앙 언론사가 취재를 왔다. 그러자 설명회가 끝난 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이들의 문의가 쏟아졌다. 신 교장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신청자가 너무 몰리는 바람에 75가구를 끝으로 모집을 중단해야 했다.
미리 마련해 둔 기준에 따라 일곱 가구가 뽑혔고, 학교엔 17명의 새 아이들이 생기면서 학생 수가 27명으로 늘었다. 학교가 살아나면서 문을 닫았던 마트가 다시 문을 여는 등 마을도 되살아났다.
"아이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절로 웃음이 나죠. 마을 사람과 새로 생긴 카페에서 만나서 수다도 떨어요. 여러모로 학교가 살아나면서 저도, 마을도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이 학생들이 커서도 여기서 보낸 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 - 유태성 이장 (73쪽)
서하초 모델은 오래갈 수 있을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많은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장 소장은 LH(한국토지주택공사)를 찾아가 더 많은 이주민이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을 지어달라고 했고, LH가 이를 받아들였다. LH는 2020년 3월 '농촌 활성화 사업 모델 TF'를 꾸려 이 일에 뛰어들었고, 두 달 뒤 민간건설업자가 지은 주택을 매입해 임대·운영하는 방식으로 서하초 건너편에 12채의 단지형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함양군도 비용의 15%를 대기로 했다. 월 임대료는 56~82제곱미터 기준으로 15~20만 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최대 20년 동안 살 수 있도록 했다.
사업을 책임졌던 정승태 LH 경남지역본부 부장은 "신속한 의사 결정과 지자체의 지원이 어떤 결과를 내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사례"라면서 조직마다 의지를 가지고 일을 해 나가는 '키 플레이어'(key player)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LH는 이웃 안의면에도 공동 주택 60호를 짓는가 하면, 훗날 서하초를 졸업한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도 계속 함양군에 머물 수 있도록 '일자리형 매입 임대주택'도 지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