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 서울 중랑구의 소규모주택정비 관리지역인 모아타운 사업지에서 열린 지역주민들과의 도심 주택공급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한국의 현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투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불합리한 규제가 시장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지난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제54회 국무회의에서 한 말입니다. 윤 대통령이 지목한 "불합리한 규제"는 분양가상한제를 적용받은 저렴한 아파트에 청약 당첨됐을 경우 입주 시점에 무조건 2~5년간 직접 거주해야 하는 '실거주 의무'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싱가포르 주택정책의 핵심인 실거주 의무 제도가 한국에서는 왜 불합리한 규제가 됐을까요?
실거주 의무 제도는 부동산시장이 과열됐던 2021년 2월 투기를 막고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입됐습니다. 모든 아파트에 적용되는 건 아니고 주변 시세에 비해 저렴한 일부 분양주택에 대한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기세력을 배제하고 무주택 실거주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이를 두고 "시장을 왜곡"하는 "불합리하는 규제"라 말하며 제도 폐지를 요구한 것입니다.
아파트를 서민의 주거공간이라 여기는 게 아니라 시세 차익을 위해 사고 파는 시장의 하나로 보고 있다는 걸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지명된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22일 임명 재가) 역시 청문회에서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실거주 의무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이어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게 투기라는 분도 있지만, 주거사다리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102.2%입니다. 모두가 집 한 채는 가질 수 있을 만큼 주택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자가점유율은 57.6%로 떨어지고, 수도권만 한정해서 보면 51.3%로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집은 많지만 한 사람이 투기 목적으로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정작 집이 필요하지만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아직도 절반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실거주 의무 제도는 한마디로 무주택자에게 싸게 분양해 주는 대신 일정 기간은 진짜로 거기에서 살라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입주 전에 전매제한과 실거주 의무 제도를 폐지해 줄 걸 믿고, 들어가서 살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싸게 분양받아서 비싸게 되팔 요량으로 너도나도 분양신청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거주 하려던 무주택자가 분양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럴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끝까지 실거주 의무 제도를 지켜서 실거주 목적의 무주택자의 청약 말고는 모두 LH에 분양가 그대로 되팔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청약에서도 차익을 노린 투기꾼들이 청약할 엄두를 못 내고, 실수요자에게 보다 높은 당첨 기회를 줄 수 있는 겁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한 재건축 아파트는 분양가 대비 6억 원 이상 시세가 올랐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거주 의사가 없으면서도 아파트를 분양받아 시세차익을 보려는 이들을 위하는 것인 양 기존 제도마저 폐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해당 부처 장관 후보자는 집값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른바 갭투자를 두고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게 주거사다리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겁니다. 주거사다리의 한 부분이 아니라 주거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입니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내집 마련 때문에 결혼과 출산도 미루는 나라에서 투기 방지와 무주택자의 내집 마련 대책에 힘써야 할 정부가, 도리어 투기꾼들의 바람대로 전매제한을 완화하고 실거주 의무 제도를 폐지하려는 등 거꾸로만 가고 있습니다. 정부의 역주행을 막을 수 있는 의회권력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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