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에서 발표하는 안영수 목사.
일제청산연구소
역사학계에서 규명된 사실관계와 더불어 김이직 가문에서 전승되는 일화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강의한 안영수 목사는 김이직이 러시아로 망명한 동기를 강의 초반에 소개했다. 일본이 강화도사건(운요호사건)을 도발한 1875년에 지금의 평안남도 남서부 용강군에서 태어나고 대한제국 장교로 근무한 김이직이 고국을 떠나게 된 것은 일본 때문이었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후의 의병장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안 목사는 설명했다.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레드 콤플렉스를 씌우려는 시도가 금년 하반기 들어 두드러졌지만, 김이직이 망명할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봉건국가였다. 러시아를 선택한 것은 한국과 가까우면서도 일본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곳을 항일투쟁 근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에 관해선, 홍범도 역시 다를 바 없다. 러시아에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선 것은 이들 모두에게 뜻밖의 사태였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사전에선 1907년에 김이직이 민란을 일으켜 지방 관헌들을 처단한 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다고 말한다. 그가 일으킨 민란이 일본과 관련된 의병 활동이었음을 보여주는 설명이다. 장교를 그만두고 항일투쟁에 뛰어 들어갔다가 일본에 쫓겨 러시아로 내몰렸던 것이다.
32세 때인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인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간 김이직은 건재 약국인 덕창국을 공동 경영하면서 이곳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들었다. 2007년에 <역사문화연구> 제26집에 실린 반병률 교수의 논문 '4월 참변 당시 희생된 한인 애국지사들'은 "덕창국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정치 망명자들이 서신 연락을 하거나 유숙해가는 장소였으며 경제적 원조를 받는 곳"이었다고 설명한다.
포럼에서 안 목사는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덕창국이 독립군 부대에 식량·의복·신발 기타 군수품도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덕창국은 사람을 살리는 약재뿐 아니라 한민족의 독립을 위한 약재도 취급하는 약국이었던 셈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이나 장소를 제공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김이직의 활동은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전직 장교이자 의병장인 그는 자금과 장소를 후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직접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안영수 목사는 김이직이 1913년에 한국인 학교인 동흥학교를 세우고, 홍범도·최재형·이상설·이동휘·이동녕이 지도부로 참여한 권업회의 지회 총무가 된 일을 소개했다. 또 1918년에 러시아 교민들의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단체인 전로(全露)한족회중앙총회 상설위원으로 선출된 일도 언급했다. 3·1운동 직전에는 임시정부 형태를 갖춘 대한국민의회의 상설위원으로 선임됐다고 안 목사는 말했다.
김이직의 자금력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선전하거나 지원하는 데도 활용했다. 안 목사는 김이직이 1914년에 안중근 전기를 간행하기 위해 기념사진을 판매한 일, 1919년에 지금의 서울역에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와 함께 단체 활동을 한 일도 소개했다.
이와 더불어, 1919년 니콜리스크에서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동포들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벌인 일도 포럼에서 언급됐다. "콜레라가 창궐하자 엄주필 선생 등과 함께 임시위원회를 열어서 구제 사업을 펼칩니다"라고 안 목사는 설명했다. 김이직이 독립운동과 약국 사업뿐 아니라 교민들의 건강과 보건에까지 신경을 쓰는 지도자적 면모를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같은 활약상은 일본이 그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러시아 땅에서 한국 독립군 약 380명이 러시아군과 연합해 일본 군인 및 관원 700여 명을 살해했다(니항사건). 그 직후 일본이 보복 차원에서 벌인 것이 한국 교민들을 겨냥한 4월 참변이다.
이때 피해를 입은 대표적 인물들이 최재형·엄주필·황경섭과 더불어 김이직이다. 4월 5일 일본군에 체포된 그는 이틀 뒤 살해됐다. 3·1운동과 니항사건에 대한 일본의 보복으로 김이직이 이 참변의 희생자가 됐던 것이다. 일본군이 그에게 분풀이를 했다는 것은 그 전까지 그가 치열한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다.
후손들의 자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