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섬 북쪽, 한강대교 교각 근처에 세워진 자그마한 원혼비.
윤태옥
우리가 다짐을 해야 할 것에는 군을 포함한 정부와 국민 사이의 커뮤니케이션도 있다. 그것은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면서 정부와 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한강을 넘어 탈출하는 비극적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한국전쟁에 관한 첫 번째 방송은 6월 25일 7시의 전쟁 발발보도였다. 이때부터 28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까지 정부의 방송은 서울 시민, 아니 국민의 동요를 막기에만 충실한, 그러나 내용은 거짓과 기만 투성이었다.
26일에는 국군은 해주를 점령한 기세로 평양과 원산을 향해 진격중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가짜 뉴스가 국방부 보도자료로 방송됐다. 27일에는 의정부를 탈환했고(동두천으로 일시 북진한 적은 있었다) 수원으로 천도하는 것도 취소했다고 방송했다.
27일 오후 4시에는 '내일부터 미군이 참전한다'는 뉴스를 특별방송으로 내보냈다. 27일 밤 10시에는 이승만의 육성이 방송됐다. 꽤 오랫동안 이승만이 육성으로 서울을 사수하니 안심하라고 방송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승만의 실제 육성은 "미국이 유능한 장교와 군수물자를 보낸다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서울이 아니라 대전의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녹음된 것이다.
상식적이지 않았던 이승만의 피란 동선
이승만은 27일 새벽 3시 부인과 비서 셋이서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 나갔다. 열차는 대구까지 갔다가 열차를 돌려 대전에 머물렀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에 중요한 요소인 만큼 대통령을 위험지역에서 피신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서울 시민에게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부터 폭파시킨 정부의 처신과 결합하면 뭐라 해석해야 할지. 게다가 당시 이승만의 육성을 녹음한 방송인 유병은에 의하면 녹음을 대전에서 한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는 협박성 다짐까지 받았다니.
이승만의 피란도 상식적이지 않았다. 아직 한강 방어선이 유지되고 있던 7월 1일 이승만은 승용차로 대전을 떠나 익산(당시의 이리)에서 기차를 타고 목포로 갔다. 기차에서 해군 소해정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가 목포에서 소해정을 타고 19시간이나 항해를 해서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7일을 머물렀다가 7월 9일 대구로 다시 올라왔다.
대구가 목적지였으면 대전에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었는데 왜 목포로 가서 바닷길로 부산으로 갔고, 왜 다시 북상하여 대구로 온 것일까. 열흘 동안 대통령은 부재중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해도 대전에서 아직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이게 정상적인 정부의 정상적인 대통령이라 할 수 있을까.
정부와 국민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형태로, 어떤 수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지 다양한 주장과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국민 방송과 비밀스럽고 이상한 대통령의 행보는, 우리의 역사를 읽어가는 나에게 분노가 뒤섞인 부끄러움만 안겨줄 뿐이다.
유재웅 위기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은 한국전쟁 초기전투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승패는 무기와 병력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군인만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휘부와 일선 병사가 혼연일체가 되어야한다. 정부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필수적이다. 6.25 발발 전후에 우리 정부와 군이 보여준 커뮤니케이션 행태는 위기극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분열과 불신을 조장한 것과 다름 아니다. 그 결과는 전쟁 초기 어이없이 무너진 전세가 말해준다. 전쟁이라는 최고의 국가위기상황에서 국가통수권자의 소임은 막중하다. 6.25 당시 우리 대통령의 행보와 메시지는 안타깝고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과거의 실패에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는 게 중요하다."
이제 서울의 강북에서 한강 이남으로 이동할 차례지만, 한강에서 잠시 멈춰 인도교 폭파 사건은 어찌 처리됐을까. 이승만은 수도를 탈취당한 책임을 물어 채병덕을 좌천시켰다. 그 자리에는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하다 급거 귀국한 정일권(33세)을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시켜 임명했다. 채병덕은 7월 27일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를 수행한 최창식은 9월 21일 처형됐다. 이런 엄청난 사고가 났으나 최종 의사결정을 하고 지시한 자는 전사했고, 처벌은 상부의 명령을 수행한 현장의 책임자가 끌어안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