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5 15:49최종 업데이트 23.06.1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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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1968년 4월에 건립했다. 2023년 6월 7일. 정진오

우리 역사에서 영웅은 여럿이지만 성웅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이순신.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를 맡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지금처럼 섬나라로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왕위에 있던 선조는 백성을 내버린 채 혼자서만 살겠다고 도망치던 인물이지만, 전쟁 전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앉힌 결정만큼은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 '신의 한 수'였다.

이순신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마음을 다하여 혹시 모를 외적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러나 임금을 비롯한 관료들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전쟁 위기에서도 천하태평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고, 단단히 준비해야 할 전선에 중앙정부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최전선의 부대마다 당사자들이 식량이며 무기며 많은 걸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구조였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전쟁 대비 태세를 갖춘 건 이순신과 그를 천거한 유성룡을 비롯한 극소수였다.


이순신은 왜적들로부터 노획한 조총(鳥銃)을 본떠 우리 식의 또 다른 조총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만이었다. 이순신은 이와 관련한 보고서를 임금에게 올리면서 그 주역인 대장장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고 포상을 요청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임금이 읽을 문서에 노비인 대장장이 이름을 적는 일은 당시로는 무척 용기 있는 일이었을 게다. 임금에게 자신의 공은 내세우지 않고 대장장이들에게 그 공을 돌리는 일이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도 가능했을까?

이순신이 1593년 9월 초에 작성한 <화포(조총)를 봉해 올리는 일을 임금께 보고하는 장계(封進火砲狀)>. 그동안의 전투에서 수많은 조총을 노획했고, 그 우수한 성능을 잘 알고 있어서 조총을 만들려고 노력한 끝에 드디어 군관 정사준이 그 방법을 터득해서, 대장장이(冶匠) 낙안 수군 이필종(李必從), 순천 사노비 안성(安成), 김해 절 노비 동지(同之), 거제 절 노비 언복(彦福) 등이 정철(正鐵)을 두드려 조총과 똑같은 성능을 가진 새로운 조총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순신의 조총 개발에 최소 4명의 대장장이가 뛰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순신은 자신의 수군 각 진영과 각 고을에서 조총을 만들도록 했으며, 대장장이들이 만든 조총 1자루는 권율 장군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임금에게 5자루를 봉해 올리면서 전국 각지에서 이 조총을 만들도록 명할 것과 조선의 조총을 만드는 데 성공한 휘하 장교와 대장장이들에게 특별한 상을 내릴 것을 요청했다.

1593년 5월, 조총 제작에 성공한 이순신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기념관 전시실의 조총 두 자루. 일본 재일 한일문화협회에서 기증한 거라고 한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전해져 일본의 대장장이가 새롭게 만들어낸 조총의 초창기 모델에서 많이 개량된 형태다. 2023년 6월 8일. 정진오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기념관 전시실에 전시 중인 장군의 장검 두 자루. 1594년 4월 태귀련, 이무생 등 대장장이들이 만들어 바친 칼이다. 길이가 197.5cm이고 무게가 4kg이 넘는다. 2023년 6월 8일. 정진오

이순신이 조총 제작에 성공한 건 임금에게 보고 문서를 올리기 4개월 전인 1593년 5월이었다. <난중일기> 1593년 5월 12일 자에 '새로 만든 정철총통을 비변사로 보냈다(新造正鐵銃筒 送于備邊司)'는 대목이 있다. 비변사는 당시 각종 업무를 총괄하는 국가 최고 기관이었다. '신조정철총통(新造正鐵銃筒)'이란 구절을 노산 이은상(1903~1982)은 '새로 만든 쇠총'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아무튼, 전문가들은 이 정철총통 또는 쇠총이 일본의 조총을 본떠 만든 조선의 조총이었다고 본다.

이순신은 자신의 부대에서 일하던 대장장이들이 만들어낸 조총을 '정철총통(正鐵銃筒)'이라 쓰기도 했고, '조통(鳥筒)'이라 하기도 했다. 일본의 조총은 '왜통(倭筒)'이라 적기도 했다. 이순신의 조총은 성능이 꽤 좋았던 모양이다.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은 2018년 펴낸 <난중일기>에 이순신의 일기와 수많은 장계뿐만 아니고 일기 속 메모까지도 번역해 실었다. 이 책에 실린 1593년 9월 15일 일기 뒤 메모를 보면, 온갖 생각 끝에 조통을 만들었는데 왜통과 비교해도 아주 절묘하다면서 명나라 사람들이 시험 사격을 했는데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적었다.

오래 전부터 조총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명나라 군인들까지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그 이순신의 조총을 받아든 임금 선조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조는 이순신이 올려보낸 조총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선조실록>을 보면, 1593년 6월 16일 선조는 "조총을 만들 줄 안다는 생포한 왜인에게 조총을 만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순신이 정철총통을 만들어 보낸 지 1개월도 더 지난 뒤였다. 임금이 왜적을 피해 도성을 벗어난 상태였지만 이순신의 조총을 받아보고도 남을 시간이다.

선조의 조총 제작 지시 직후인 1593년 6월 29일 비변사는 선조에게 인재, 식량, 군사 등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보고했다. 그 중 무기에 대해서도 말했는데, "무기에 있어서는 적을 방어하는 데 궁시(弓矢)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나, 그 소리와 위엄이 적을 진압하여 일거에 섬멸하는 것은 각양(各樣)의 화포가 제일"이라면서 전국 여러 곳에 화포 제작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순신은 비변사에 우리 기술로 만든 조총을 보냈는데, 비변사는 그 얘기는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화포를 더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보고한 거다. 더 이상한 일은, 임금 선조가 직접 조총을 고안해 만들었다는 놀라운 얘기가 1593년 11월 12일 <선조실록>에 실렸다는 점이다. 유성룡에게 조총을 주면서 했다는 선조의 말이 실록에 나와 있다.

"조총(鳥銃)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진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線)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卿)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 번 웃기 바란다."

'내가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다.' 선조 자신이 골똘히 생각해 조총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발사하는 사수와 화약 넣는 조를 돌아가면서 배치하면 효과적일 것이라는 사격술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한 사관은 임금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해서는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사관은 특히 대신들도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그대로 순응하느라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으니 통탄해 마지않는다고 선조의 조총 제작 문제와 관련해 대신들까지 싸잡아 날을 세웠다.

임금 선조는 진짜로 조총을 만들었을까
 
현충사에 모셔진 이순신 장군 영정 앞 향로에서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2023년 6월 8일 정진오
 
그러면 임금 선조는 진짜로 조총을 만들었을까? 임진왜란 내내 보여준 선조의 태도와 이때의 앞뒤 정황으로는 선조가 직접 총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선조가 조총의 존재를 안 것은 임진왜란 발발 3년여 전이다. <선조수정실록> 1589년 7월 1일 자는 '(일본의 사신) 평의지(平義智) 등이 공작(孔雀) 1쌍과 조총 수삼 정을 바쳤는데, 공작은 남양(南陽) 해도(海島)로 놓아 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하도록 명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라고 썼다. 선조의 명령에 따라 공작새는 바다로 날아갔을 테고 조총은 군기시에 보내졌을 것인데 그 뒤로 그 조총의 행방은 묘연하다.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왜군의 조총을 깊이 연구한 끝에 새로운 조총을 만들어낼 정도로 신무기나 과학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면 일본 사신이 조총을 진상했을 때 그냥 군기시에 간직하라고만 하지 않았을 거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무기인 조총의 성능을 시험하고 좀 더 나은 걸 개발하도록 명령했어야 했다. 조총을 처음 접한 중국과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선조가 유성룡에게 건네준 그 총의 정체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의 조총이 일본 사신 평의지가 준 것을 군기시에서 연구해서 개발한 것인지, 이순신이 대장장이들과 함께 제작해 비변사에 올려보낸 그것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실제로 자신이 고안해서 만들어낸 것인지, 도대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대신들이 아첨하면서 한마디 말도 없다'는 사관의 비판까지 한 데 묶어서 살피자니 더욱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조선 후기 조재삼(1808~1866)은 백과사전류의 책 <송남잡지(松南雜識)>를 펴내면서 <조총> 편에 '(조총의) 총머리(銃頭)에 구멍을 뚫은 것은 충무공 이순신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격화선(擊火線) 때문이다'라고 썼다. 격화선은 불을 붙여 조총의 화약을 터트리게 하는 선이다.

조재삼은 이순신의 조총 개량을 이야기하면서 선조의 조총 얘기는 쓰지 않았다. 선조가 유성룡에게 조총을 건네면서 했다는 말, "혹시라도 선(線)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을 염려해 이런 총을 만들었다고 한 바로 그 선이 조재삼이 거론한 격화선일 텐데 조재삼은 선조를 말하지 않고 이순신을 이야기했다.

선조가 개발했다는 조총의 정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순신의 조총은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 현장의 절실함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초기 조총에 왼쪽 어깨 관통상을 입었다. 1592년 5월 29일 자 일기에 그 내용이 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다. 나도 왼쪽 어깨 위를 탄환에 맞았다. 등으로 뚫고 나갔으나 중상까지는 아니었다. 활꾼과 격군 중에서도 탄환에 맞은 사람이 또한 많았다."

이순신의 조총 개발팀, 5명 중 4명이 대장장이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 동상을 마주 보고 왼편에는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라는 장군의 유명한 이야기 등 어록 표석 23개가 죽 늘어서 있다. 오른쪽에는 1592년 5월 7일 왜군에게 최초로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 등 장군이 이루어낸 중요 해전을 알리는 표석 12개가 세워져 있다. 현충일 하루 뒤인 2023년 6월 7일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에는 곱게 포장한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정진오

전쟁 발발 한 달 보름여 만에 이순신 자신도 어깨 관통상을 입으며 조총의 위력을 몸으로 체감한 터였다. 그날에만도 많은 병사가 조총에 쓰러졌다. 이순신은 이처럼 전쟁 초기부터 조총과 맞닥뜨리면서 이게 전쟁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판단했고, 조총 개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때 자신 휘하에 조총 개발팀을 조직했을 거다.

이순신의 조총 개발팀은 앞에서 언급한 <화포(조총)를 봉해 올리는 일을 임금께 보고하는 장계>에 등장하는 군관 정사준,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노비 안성, 김해 절 노비 동지, 거제 절 노비 언복 등 5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4명이 대장장이였으며, 그 중 3명은 노비였다.

팀장 격인 정사준(鄭思竣, 1553~?)은 전라남도 순천 출신으로 조총 개발 책임 이외에도 이순신 휘하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거제 절 노비 언복은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였다. 그의 환도 제작 솜씨가 매우 뛰어났던 모양인지 이순신은 그를 가까이 두고서 환도 제작에도 참여시켰다. <난중일기> 1595년 7월 21일 자에 보면, '태구련과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수사와 두 조방장이 있는 곳에 각각 한 자루씩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조총 개발 과정에 참여한 대장장이가 원래는 칼 제작 전문가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군대의 주요 무기가 칼에서 조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대장장이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인데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 일본의 조총 개발에도 사무라이용 칼을 만들던 대장장이들이 참여했다. 일본의 남쪽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서는 1543년 포르투갈 조총을 넘겨받아 1년여의 고투 끝에 새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게 일본 조총의 시초이다. 그 주역이 다네가시마에서 칼 만들던 대장장이였다.

전쟁 발발 전, 선조가 진도 군수이던 이순신을 품계를 뛰어넘어 전라좌수사에 제수한 것은 1591년 2월 13일이었다. 그러자 며칠 뒤 사간원에서 들고 일어났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기는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면서 교체하라고 요구한 거였다. 선조는 이 사간원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게 '신의 한 수'였다.

이순신이 책임을 맡은 전라좌수영 지역은 요즘으로 치면 전라남도 순천시, 여수시, 고흥군, 광양시, 보성군 일대였다. 전라도 동쪽 해안가인데 좌수영이라 한 것은 서울에서 임금이 보았을 때 왼쪽이기 때문이었다.

전라좌수영은 왜군 측에서 보면 반드시 넘어야 할 물길이었다. 육로로 빠르게 북상하는 주력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보충병과 각종 보급품을 실은 선박들이 남해를 통과해 서해안을 따라 한강이나 대동강까지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경상도 바닷길은 쉽사리 장악했는데 이순신이 버틴 전라도를 넘지 못해 애를 먹었고, 이게 결국은 명나라 참전과 우리 의병 조직의 시간까지 벌어주었다.

군수물자 관리에 철저했던 이순신
 
충남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기슭의 이순신 장군 묘소. 부인과 합장 묘이다. 어떤 할머니가 상석(床石) 위에 물을 올려놓고 묘소에 절하고 있다. 2023년 6월 8일. 정진오
 
이순신 장군 묘소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 1693년 장군의 외손자 홍우기가 효종 임금 때 영의정 김육에게 비문을 부탁해 세웠다. 신도비를 등에 받치고 있는 거북의 얼굴 모양이 무척 해학적이다. 비 위쪽은 용 두 마리가 휘감고 있다(왼쪽). 묘역 바로 아래에는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조 임금이 손수 비문을 지어 1794년에 세운 이충무공 어제신도비가 있다(오른쪽). 2023년 6월 8일. 정진오

이순신은 아무런 대책 없이 전쟁을 맞은 게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를 맡았으면서도 대비태세는 몇 년 동안 해야 가능할 만큼 많이 갖추었다. 이순신의 그 1년 2개월이 전쟁에서 조선을 구하는 준비 기간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맡은 일에 있는 힘을 다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시작한다. 설날인 이날 병마절도사의 군관이 와서 설 선물과 함께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고 썼다. 화살인 장전과 편전은 당시 조선군의 대표적인 전투용 무기였다. 새해 첫날 인사를 오면서 무기를 가져왔다는 것은 이순신이 평소 군수물자 확충에 관심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본인은 물론이고 각 진영 군사들의 활쏘기 훈련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군수물자 관리도 철저했다. 이순신은 부하들이 맡은 일을 소홀히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 엄하게 벌했다. 전쟁 3개월 전, 1592년 1월 16일 일기에는 여러 내용이 담겼다.

"방답의 병선(兵船) 담당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의 낡고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았기에 장(杖)에 처했다.… 성(城) 아래 사는 토병(土兵) 박몽세가 석수(石手)로 선생원의 쇠사슬 설치할 돌을 뜨는 곳에 갔다가 근처에 사는 사람의 강아지에게 해를 끼쳤기에, 장(杖) 80에 처했다."

낡은 군선을 수리하지 않은 책임자들에게 몽둥이로 때리는 처벌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이런 경우는 전쟁이 터지기까지는 물론이고 전쟁 중에도 여러 번 나온다. 같은해 2월 19일부터는 각 진영을 돌면서 점검했다. 그 순시 중에 문제가 드러나면 처벌하고 고치도록 했다.

새로 쌓은 포갱(浦坑)이 허물어져 석수 등을 벌주었다(2월 15일), 각 항목의 전쟁 준비에 탈 난 곳이 많았다. 군관과 색리들의 죄를 처벌했다(2월 25일), 활과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는 깨지고 훼손된 물건 많아 죄를 따졌다(3월 6일) 등이다. 2월 25일의 표현처럼 이순신은 전쟁 준비(戰備)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뱃길에 쇠사슬을 설치하기 위한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쇠사슬은 바다 물길 아래로 쇠사슬을 설치해 적선의 통과를 막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쇠사슬을 만드는 작업에는 이순신 휘하의 대장장이들이 동원되었을 게 분명하다. 쇠사슬은 끊어지면 안 되기에 대장장이들이 무척 공을 들여 단단하게 만들었을 터이다. 쇠사슬이 설치된 건 3월 27일이다. 전쟁 보름 전이다. 이순신은 이때 쇠사슬 설치 작업을 직접 나서서 감독했다.

다시 1월 16일 일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띈다. 강아지(狗子)에게 해를 끼친 석공에게 장 80대의 몽둥이찜질을 했다는 얘기다. 그 석공이 강아지를 어떻게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지만, 강아지 주인이 민원을 제기했던 모양이다. 이순신은 병사들이 이웃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엄하게 다루었던 듯하다.

유성룡과 자주 전투 방법을 논의했던 이순신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기념관 전시실에 놓여 있는 거북선 모형. 엄청나게 큰 돛 2폭을 펼쳤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 거북선을 완성하면서 돛을 만드는 데 필요한 베 29필을 받았다는 내용을 『난중일기』에 적기도 했다. 2023년 6월 8일. 정진오

이순신은 평시임에도 유성룡 등 생각이 통하는 사람과 자주 전투 방법에 대하여 논의를 주고받았다. 3월 5일에는, 좌의정 유성룡이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보내왔는데, 여기에 수전(水戰), 육전(陸戰), 화공법(火攻法) 등에 관한 전술을 일일이 설명했다면서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이론이라고 썼다.

이순신은 늘 적의 위치에서 각 진영의 형세를 살폈으며, 전라우수영 등 옆 부대와의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특히 거북선을 완성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 2월 8일 거북선에 펼칠 돛을 만들기 위하여 베 29필을 받았고, 3월 27일에는 거북선에서 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 

4월 11일 거북선에 쓸 돛을 만들었다. 베 29필로 돛을 만드는 데 2개월이 넘게 걸렸다. 그 이튿날인 4월 12일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바다 위를 빠르게 오갈 수 있으면서도 파괴력 넘치는 무장을 갖춘 거북선이 드디어 완성된 거다. 물론, 이때 거북선 제조에는 수많은 대장장이와 목수들이 참여했을 터이다.

거북선 완성 사흘 뒤인 1592년 4월 15일, 이순신은 왜선 수백 척이 부산 앞바다에 진을 쳤다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통(傳通)을 받았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도망치는 적을 뒤쫓다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순신은 이때까지 무려 400여 차례의 해전을 치렀다.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둔 그날 선조는 유성룡을 파직했다.

이순신이 그렇게 스러진 지, 이순신과 대장장이들의 조총 개발의 공(功)이 어디론가 사라진 지 30여 년 후 조선은 다시 도륙의 참화를 입었다.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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