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 포스트의 편집장 박종언그는 죽음보다 깊은 글을 쓰려 한다.
민병래
2019년인가 어느 여름날 아침 집을 나서려는데 박종언은 뭔가 불안해 발을 뗄 수 없었다. 선풍기는 꺼져 있고 세탁기도 멈춰 있고 다 확인했는데 그는 맴맴 돌 뿐이었다. "이제는 나가자"를 천 번쯤 외쳤으리라. 가까스로 집 밖을 나서 지하철을 탔는데 자기도 모르게 다음 정거장에서 집 방향으로 가는 전철로 바꿔 타고 말았다.
병원에서는 '확인강박증'이라고 했다. 박종언은 2010년 서울대 정신병원에서 조현병 확진을 받고 망상증을 조절하는 '클로자핀'을 오랫동안 먹었다. 그 약이 부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망상증도 힘겨운데 강박증하고도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최근 2, 3년 열쇠를 걸어잠그면 보통 100번 정도 손잡이를 돌렸다. 확인 또 확인, 피가 말랐다. 손잡이는 아예 달창날 지경이었다. 오늘 아침은 그래도 양반이다. 10분 만에 벗어났으니... 박종언은 마포에 있는 직장, 정신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신문사 '마인드포스트'를 향해 잰걸음을 옮겼다.
브라질로 떠난 유학에서 만난 고난
1971년생 박종언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 90학번으로 들어가 브라질 문학을 공부하고, 1997년 상파울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예기치 못한 고난을 만났다. 1998년경이었나, 우연히 펼친 잡지에서 한 주교의 후배 사제가 나무에 목매달려 죽은 사연을 접했다.
이 주교는 브라질의 불평등을 규탄하고 경작자에게 토지를 돌려주라고 외치던 인물이었다. 성당에 있던 나무에는 "다음은 네(주교) 차례다"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고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그 주교는 교황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를 읽으며 박종언은 돌연 브라질이 무서워졌다.
상파울루의 바람이 매서웠다. 멀리 아마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얼음 송곳을 품고 있는 듯했다. 상위 1%가 토지의 80% 이상을 가진 나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마약조직에 의해서 하루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영혼을 느끼고 브라질 문학의 정수에 빠지려 왔는데 사람들이 매일 총 맞아 죽는 현실을 만날 줄이야!
박종언은 싸락눈 내리던 모교의 풍경, 고향 울진 바다의 파도 소리를 떠올리며 4년을 버텼다. 2001년 귀국할 때, 그의 낯빛은 중늙은이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선 방안에 틀어박혔다. 두 달 세 달이 넘어가자 어머니는 먼 나라 갔다 오더니 무엔가 씌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엉뚱하게 조상을 떠나보내는 '천도재'를 올렸다.
박종언은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다. 서울 누나 집에 머무르며 소규모 신문사의 문을 두드렸다. 월급이 제때 안 나왔다. 여기저기 옮겨봐도 마찬가지, 아예 월급이 없고 광고 팔아서 먹고살라는 데도 있었다. 불안한 하루하루, 걱정하는 누나와 갈등이 깊어졌다. 그때 박종언의 머리 한 귀퉁이가 출렁거렸다. 마음속의 불안감, 무력감에 불씨가 붙은 듯 꿈틀댔다. 브라질에서 4년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불길에 휩싸였다.
박종언은 길을 가다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갔다. '왜 날 쳐다봐?',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거 아니야?' 하며 시비를 걸었다. 길을 걷는 게 두려웠다. 오늘은 또 누구와 다툼을 벌일지, 어느 날 박종언은 이웃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는 '왜 나를 감시하냐'고 따졌다. 얼굴을 처음 본 이웃은 문을 닫으려 했고 박종언은 몸을 디밀었다.
병원에서는 심한 스트레스를 겪어 피해망상증을 앓고 있으며 입원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박종언은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나 집에서 나왔다. 신문사는 그만두었고 잠잘 곳은 없는 처지, 고왔던 그의 손이 거칠어졌다.
박종언은 리어카를 하나 장만해 폐지를 주웠다. 사과 장사도 일 년 정도 했고, 엿장수도 했다. 고시원을 전전하다가 울진바다에서 배를 타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천에서 덕적도를 오가는 꽃게배에 올랐다. 백팔십 센티미터가 넘는 키를 가진 박종언은 초보였지만 쓸 만했다. 휴일 없이 한 달 내내 폭풍주의보가 있는 날만 빼고 일했다. 새벽 세 시부터.
그렇게 해서 첫 월급날 120만 원을 받았다. 그날 동료들과 인천부둣가를 걸었다. 누군가 그랬다 광부와 선원은 땅 위를 걸을 때가 행복하다고. 그의 발은 경쾌했고 그의 손은 술집 문을 열어젖혔다. 누나가 고생고생해 그를 찾았을 때 박종언의 방에는 빈 술병이 2층 높이로 쌓여 있었다.
"우리를 빼고 우리를 논하지 말라"
박종언은 조현병 진단을 받은 지 10년 만인 2010년, 누나와 형의 도움으로 서울대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 입원했다. 그는 5개월 동안 망상증상을 조절하는 치료를 받았다.
박종언이 서울대 병원을 나와 간 곳이 '공동생활가정', 한 달에 30만 원 정도를 내고 정신장애인 7~8명이 함께 생활하는 공공시설이다. 시설장과 보호사가 있고 두세 명이 한 방을 같이 썼다. 한 곳에는 3년까지 머물 수 있는데 박종언은 구로구와 도봉구에서 각 3년씩 지냈다.
도봉구에서 지내던 시절, 보호사는 박종언에게 '정신장애인문학회'를 알려주며 여기에 나가볼 것을 권했다. 박종언은 제안을 반겼다. 문학회에 나가 10명의 글쓰기 동지를 만났다. 개중에는 망상과 환청으로 종잡을 수 없는 언어를 쓰고 자신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명을 맡았다는 기분에 종종 사로잡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회장을 맡아 문학회를 이끌며 함께 글을 쓰고 합평을 주도했다.
박종언은 2014년 장애인 문학상에 응모해, 한센병을 앓은 한하운시인에게 바치는 시 '위로'로 운문 부문에서 은상을 받았다. 2015년에는 정신장애의 아픔을 그린 소설 '한줌의 슬픔'으로 상금 300만 원의 금상을 받았다. 정신장애인 남편과 아내가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의 작품이었다.
이런 박종언을 정신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던 교수 한 명이 눈여겨 봤다. 그는 박종언에게 정신장애인이거나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는 사람이 기자인 당사자 신문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 당시 '에이블뉴스'나 '비마이너' 같은 장애인 전반을 다루는 매체는 있지만 정신장애인 문제에 집중하는 미디어는 없었다. 그는 동의했다. 제안된 지 3년 만인 2018년 6월, "우리를 빼고 우리를 논하지 말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마인드포스트'는 출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