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커우 공원에서 만난 중국 노인이 물 적신 붓으로 바닥에 한글 문장을 쓰고 있다.
류승연
25살의 청년 윤봉길이 의거했던 1932년은 임시정부의 침체기이기도 했다. 계파 갈등과 재정난 등으로 인해 임시정부의 명맥만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청사의 집세는 밀리기 일쑤였고 김구 선생의 가족들은 주워온 배추 껍질을 끓여 연명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임시정부를 '거지의 소굴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당시의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킨 건 윤봉길 의사의 의거였다. 독립운동가 김홍일과 절친한 관계였던 중국인 향차도로부터 도시락, 물통 폭탄을 전달받은 그는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 축하 행사가 이뤄졌던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 숨어들었다. 정오께 물통 폭탄을 던져 의거에 성공했다. 이 의거로 일본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가 즉사했다.
국민당 총재 장개석은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고, 1933년 5월 김구와 만난 후부터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 의사의 의거로 일제는 김구 선생에게 현상금 60만 은화를 거는 등 임시정부를 압박해 왔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0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결국 상하이를 떠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는 각각 가흥과 항저우로 흩어졌다.
목숨 걸고 백범 김구 도왔던 '그들'의 이름
정갈하고 운치 있는 중국식 골목 사이로 투박하게 세워진 이층짜리 건물. 깔끔하게 단장된 내부와 달리,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가구들이 퀴퀴한 냄새를 뿜어내던 곳. 일본에 쫓기던 김구 선생이 몸을 숨겼던, 중국 가흥의 '김구 피난처' 이야기다.
내부에는 인물 사진과 함께 저보성, 저봉장, 진동생, 주가예, 주애보 등의 글자가 나열돼 있었다. 알고 보니 중국인의 이름이었다. 목숨 걸고 김구 선생의 피신을 도운 까닭에, 그들을 기리는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