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경고문 -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 의열단은 끊임없이 경고문을 뿌리며 파괴, 암살을 예비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독립기념관
창립단원들은 형제의 의를 맺고 '공약10조'로써 조직기율을 정하였다. 김원봉이 맏형격인 '의백(義伯)'으로 선출되어 단장의 임무를 맡았다.
"대표자의 명칭을 '의백'이라 하고 있음은 단원 상호간의 관계를 반(半) 혈연적 운명공동체 의식으로써 묶인 일종의 형제 결연적 관계로 상정하였음을 말해준다."
(주석 7)
초겨울 대륙의 긴 밤이 어느새 밝았다. 새날은 11월 10일, 의열단이 정식 창단되는 날이다.
"회의는 밤새도록 계속되고, 그 이튿날 -, 곧 1919년 11월 10일 새벽에 이르러, 후일 왜적들이 오직 그 이름만 들었을 뿐으로 공포하고 전율하던 의열단은, 이에 완전한 결성을 보게 된 것이다."
(주석 8)
이날 채택된 '공약10조'는 다음과 같다.
공약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 (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 (身命) 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 (團義) 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함.
5. 의백 (義伯) 일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 (何時何地 : 어느 때 어느 곳) 에서나 매월 일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하지에서나 초회 (招會)에 필응 (必應) 함.
8. 피사 (被死) 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 (盡) 함.
9. 일 (一) 이 구 (九) 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반배 (返背) 한 자를 처살 (處殺) 함.
의열단의 창단과 관련하여 '주역'이 김원봉 아닌 황상규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의열단원 이종암의 동생 이종범은, 황상규가 "창단 혈맹을 굳히든 그날 군정서 일 때문에 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을 뿐 이미 동지들은 황상규를 의백으로 모셨던 것이다.…그리고 부단장으로는 이종암이 정해졌던 것이다."
(주석 9) 라고 황상규 초대 의백설을 주장한다. 이종범은 이어서 황상규 대신 김원봉으로 굳어지게 된 사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첫번째 총공격 때에 단장 황상규 이하 모든 동지들이 입국 활동하다가 검속을 당했고 (김원봉만 해외에 남아 있었음) 또 검속을 당한 그 분들이 왜경에서부터 왜법정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김원봉을 단장이라고 해 버렸고, 또 김원봉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김원봉이 자타가 공인한 의백 (단장)이 된 것이다.
(주석 10)
이종범은 황상규가 의백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이종암을 중심으로 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재학당시부터 뭉쳐서 움직일 때 은근히 격려도 해주고 의견도 제공해 주던 분이 북로군정서의 총재정권을 장악하고 활약하던 황상규이다. 연령으로 봐서도 거의 10년 위이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나 열의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의례히 의백으로 모시게끔 되어 있었다. 모든 동지들이 형사지(兄事之) 했을 뿐 아니라 황상규 씨 자신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더구나 김원봉에게는 고모부뻘이라는 관계도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그때 김원봉은 너무 어렸다.
(주석 11)
황상규가 의열단 창단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군정서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는 부문이다. 전문연구자들은 이종범의 주장과는 다르다. "의열단의 창단은 김원봉이 '발의'하고 '주도'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명시적으로 그랬다고 기술된 곳은 없으나, <약산과 의열단>의 전반적인 서술 기조나 정황 묘사가 마치 그랬던 것처럼 보이게끔 되어 있고, 그래서 논자들도 으레 그랬으려니 하고 믿는 소치이겠다."
(주석 12)
물론 이 연구자도 "김원봉이 창단(준비) 과정의 '주역'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창단의 최초 '발의자'였다는 명백한 증거는 별달리 찾아지지 않는다." 는 것이다. 바꿔 얘기하면 창단의 최초 발의자나 추진자는 다른 인물 (들)이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
(주석 13) 이다. 그러면서 황상규를 주목하지만, 결론은 김원봉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김원봉이 창단의 '주역'이었음은 일본경찰의 각종 자료에도 드러나고 있다. 황상규는 유능한 처조카에게 의열단의 책임을 맡기고 자신은 다른 역할을 하고자 했을 것 같다.
의열단이 창단될 때 성문화된 단의 강령 같은 것은 달리 없었다. 1923년 단재 신채호의 손으로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이 쓰여질 때까지 일제와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여, 계급을 타파하며, 토지소유를 평등하게 한다는 4대 목표를 최대의 이상으로 삼았다.
'평균지권'은 의열단의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조항은 지주소작 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가고 있던 조선 국내 사정을 두고 볼 때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의열단은 단순한 독립만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지향했으며 대한광복회의 진보적 노선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주석 14) 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석
1>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 샘, 35~36쪽, 2000.
2> 박태원, 앞의 책, 33쪽.
3> 한상도, 앞의 책, 24쪽
4> 염인, <김원봉연구>, 38~39쪽, 창작과 비평사, 1993.
5> 이종범, <의열단부단장 이종암전>, 1970.
6> 김영범, <의열단>, <한국독립운동사사전> 6, 27쪽, 독립기념관, 2004.
7> 김영범, <의열단 창립과 초기 노선에 대하여>, <한국학보> 제69집, 168쪽, 일지사, 1992. 8> 박태원, 앞의 책, 33쪽. 9> 이종범, 앞의 책, 73쪽.
10> 이종범, 앞의 책, 73쪽.
11> 이종범, 앞의 책, 72쪽.
12> 김영범, 앞의 글, 157쪽.
13> 김영범, 앞의 글, 157쪽.
14> 염인호, 앞의 책, 41쪽.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