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택배 터미널에 택배가 쌓여 있다. 자료사진.
연합뉴스
첫날 어느 젊은 택배 기사를 따라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의 철공소 많은 동네로 가서 처음으로 택배를 배웠다. 이틀 정도 따라 나가고 셋째 날부터는 지도 한 장 달랑 주고는 혼자 배송하라고 한다.
분명히 이틀이나 같이 따라 나간 곳인데 왜 그렇게 생소한지 골목도 거기가 거기 같고 지도를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봐도 한 집 찾기가 그렇게 힘들 수 없었다. 마치 부대도 전우도 다 철수한 전쟁터 한복판에 혼자 낙오된 병사 같았다. 무겁고 힘든 건 둘째 치고 집 찾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지금은 지도 같은 것 없어도 어디든 조금만 돌아다녀 보면 어렵지 않게 배송을 한다).
결국 가리봉동에 정착해 그렇게 1년 가까이 배송을 했다. 초보의 구역치고는 너무 어려운 곳이었지만, 자꾸 헤매니 더 빨리 익힐 수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교인들도 내 일을 환영하고 응원해 주었다.
교회 목회를 쉬고 있던 2020년 초 점장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다시 하면 어떻겠냐고. 경험해 봤기 때문에 더 부담이 됐다. 제대한 지 몇 년 만에 재입대하는 심정으로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식 기사로 다른 이들과 동일한 주 6일 근무였다. 가리봉동, 구로동, 가라는 곳에 다 갔다. 참 신기했다. 몇 년 만에 다시 시작했는데도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딱 맞았다. 몇 개월 고생하니 금세 익숙해졌다.
2년 가까이 일하다가 코로나에 걸려 2주간 호되게 앓았다. 마침 교회를 다시 시작할 마음이었기에 정식 기사는 2021년에 그만두고 지금은 '펑크 전문'으로 누가 아프거나 그만두어 일시적 공백이 생기면 원하는 대로 구멍을 메워준다. 5~7월 사이에도 수년 동안 맡아왔던 기사가 그만둔 구로디지털단지 부근 구역을 맡아 배송했다가 후임 기사가 와서 인계하고 그만두었다.
모두 잘 알겠지만, 코로나 이후 고객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나는 2015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동료기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좋으나 싫으나 매일 아침 물품 정리 3시간 안팎을 무조건 함께 있어야 한다.
아침에 물품을 정리하기 위해 내가 서는 자리는 뱀 꼬리처럼 길게 이어진 컨베이어 벨트 연결망 제일 끝이다. 마치 우리나라 지도에서 보면 동쪽 해안선 끝자락에 꼬리처럼 튀어나온 포항처럼 우리만 따로 5명이 위치해 있다. 우리 독수리 5형제는 정말 친했다. 30~50대로 나이는 내가 제일 많았다.
힘든 아침 시간이었지만, 매일 우리는 갑질 고객 욕도 함께 하고, 농담하고 장난치며 웃기도 하고, 무거운 물건 불평도 함께 하고, 간식도 나눠 먹고, 그러다가 다투고 삐져 며칠 말을 안 하기도 하며 지냈다.
코로나도 서로 나누는 동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