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뉴욕 타임스>에 실린 "노엄 촘스키: 챗GPT의 거짓된 약속"
뉴욕 타임스
노엄 촘스키의 <뉴욕 타임스> 기고문은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챗GPT의 거짓된 약속'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공지능의 긍정적 역할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두뇌를 능가할 것이라는 일반론적 평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인간의 뇌에 비교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는 지금, 촘스키의 지적은 시류에 비추어 매우 적절하다.
노엄 촘스키는 적어도 영향력만큼은 20세기 중반 이후 최고의 언어학자다. 일반인에게는 정치사상가, 평화운동가로 더 명성이 높지만, <통사구조론>(1957년) 이후 그가 이끈 언어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반향과 지류를 양산해 냈다. 심지어 후학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이론적 변혁과 수정을 스스로에 가하기도 했다.
그의 이론이 세계 언어학계의 흐름을 바꿔 놓기 전, 젊은 시절의 그는 논리학, 수리언어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한 대담에서 수학 분야의 어떠한 학위가 없는 자신의 말을 수학자들은 귀담아듣는데 정치 분야의 학위나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정치 이론가들은 그의 말에 귀를 닫는다고 일갈한 바 있다.
과연 촘스키다운 논박이며 인간은 지적 내용이 풍부할수록 자격 증명보다는 콘텐츠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말이다. 그의 수학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언어학자로의 명성 때문에 수학자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을 테니.
이처럼 촘스키는 언어학자로서 수리논리, 형식언어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진단한 챗GPT의 정체는 '수백 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가장 그럴듯한 대화형 답변 또는 학문적 질문에 가장 가능성 있는 응답을 제공하는 패턴 매칭을 위한 육중한 통계 엔진'이다. 그런 기계가 인간의 두뇌를 능가할 수 있을까?
인지언어학의 대가 촘스키의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의 정신은 오히려 반대로 소량의 정보로도 작동하는 놀랍도록 효율적이고 우아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물론 '놀랍다'라거나 '우아하다'는 그의 표현이 덮을 만큼 촘스키의 학문관이 낭만적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언어학 모델들은 (긍정적 의미로든 부정적 의미로든) 지극히 수학적이다.
그에게는 적어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원리로는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미래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물론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도 있고, 작곡을 할 수도 있으며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사고' 방식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추론하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열차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