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 4m17 세로 2m45의 대작이다. 하나 하나 스케치해서 옮겨 새겼다.
이상호제공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을 드나들고
이상호는 30년 넘게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했다. 처음 발병이 된 건 대학 3학년 때. 1960년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에 들어갔다가 휴학을 하고 1982년 조선대 미대에 들어갔다. 목포 홍익화실에서 만났던 홍성담 선배의 손에 이끌려 민족미술에 발을 들여놓았다. 친구, 후배와 '땅끝'이라는 조선대 미술패를 만들어 걸개, 만장, 포스터, 벽보를 하룻밤에 뚝딱 만들었다.
거친 붓질에 구성은 엉성해도 투쟁의 열기를 드높이는 데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던 1986년 5월의 어느 날 그는 거리 시위에서 붙잡혀 광주 동부경찰서로 끌려갔다. 두 시간 넘게 두드려 맞고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서 선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이상호는 자신도 모르게 유치장 문을 흔들고 악을 썼다. 그건 요구도 아니고 구호도 아니었다. 뜻 모를 울부짖음이었다.
상태가 더 나빠진 건, 1987년 '백두' 그림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구치소에 갔을 때였다. 옆방의 우상호가 건넨 <한국현대사>를 읽고 잠든 밤, 군복 입은 박정희가 꿈에 나타나 "네가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배식구에 손목을 내어놓아라, 손목을 자르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상호는 꿈에 홀려 팔을 내밀고 소리쳤다. "왜 안 자르는 거야, 왜 안 자르는거야..." 그의 비명은 서대문구치소의 밤을 흔들었다.
남영동은 무서웠다. 수사관은 이상호에게 팬티만 입힌 채 여기가 박종철이 죽은 곳이다, 라고 겁을 주며 매질을 했다. 잠을 안 재웠다. 남영동에서 열흘간 당한 고통, 공포가 서대문구치소에서 발작으로 나타난 것이다. 병사를 들락거렸다. 꾀병이라고 독방에 갇혀 매질도 당했다. 급기야 병보석으로 나온 그가 향한 곳은 서울시립정신병원, 첫 입원이었다. 서울시립정신병원을 나와서 간 곳은 나주정신병원.
이때부터 그는 입원해있던 기간만 5~6년, 들락날락한 세월은 30여 년, 긴 투병 생활을 했다. 길을 걷다 애먼 시비에 휘말리고 경찰이 눈에 띄면 멱살을 잡았다. 어느 날은 집안의 물건을 내동댕이치고 그렇게 발작은 불현듯 찾아와 이상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면 어머니의 쭈글쭈글한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향했다. 나주로 가는 길은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만봉스님에게 탱화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도 이런 증세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만난 이는 다양했다. 소값 파동으로 불을 지르고 강제로 입원된 농민, 5.18부상자, 히로뽕에 절은 깡패,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이.
병원에는 치료프로그램이 없었다. 발작 상태가 되면 침대에 묶였다. 마치 서울구치소의 독방에서처럼 매질을 당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먹으면 하루종일 졸렸다. 손발에 힘이 없고 노곤했다. 이상호는 이때도 붓을 놓지 않았다. '나주병원의 환우들' 연작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