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의 시구백인천 전 감독이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WBSC 프리미어12 예선라운드 C조 한국과 호주의 경기 전에 시구를 한 뒤 포수 양의지와 악수하고 있다. 백인천 역시 1960년대 한국 최고의 명포수로 이름을 날린 적이 있었다.
한국야구위원회
그 사건에 대한 처벌로서 MBC 청룡은 그날 경기의 1패와 함께 벌금 200만 원을 부과받았고, 백인천 감독은 별도로 벌금 100만 원과 5경기 출전 금지 조치를 받게 됐다. 사건의 당사자 김인식 선수도 벌금 10만 원, 주심 김동앙과 2루심 박명훈 역시 경기 운영 미숙의 책임을 물어 20만 원과 10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80경기 중 5경기의 의미는 컸다. 특히 백인천이 출전하지 못하게 된 5경기 중 3경기는 이미 투수진이 초토화된 최하위 팀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안타깝지만 그 시점에서 삼미와의 경기는 나머지 5개 구단 타자들에게 개인 기록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로 통하고 있었다.
결국 시즌을 모두 마쳤을 때 백인천은 .264에 불과했던 그해 리그 전체의 평균 타율 대비 무려 1할4푼8리나 높은 .412의 역사적인 타율로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한 가운데 홈런은 19개로 김봉연의 22개에 이은 2위, 타점도 64개로 김성한의 69개에 이은 2위에 올랐다.
당시에 별도로 시상하지 않던 득점, 안타 수, 2루타 수도 모두 1위였고, 심지어 도루도 각 팀의 1, 2번 타자들이 포진한 10위권 선수들에 비해 3개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11개에 달했다.
감독의 권한을 활용해 관리된 기록?
한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그리고 전 세계를 통틀어도 테드 윌리엄스가 1941년에 달성한 이후 유일하게 작성된 백인천의 4할 타율에 대해 '감독의 지위를 활용해서 만든 것'이라는 오해는 아직도 간혹 눈에 띈다.
하지만 감독의 지위를 활용해서 타율을 관리할 방법이란 '고타율을 달성한 이후 나머지 타석을 쉬게 하는 것'과 '약한 팀과의 경기에 집중적으로 기용하는 것' 말고는 상상하기 어려우며, 그 두 가지 모두 감독 백인천이 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 해 그가 타석에 서지 않은 8경기 중 5경기는 강제로 부과된 징계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중 3경기가 역사적인 약체팀 삼미와의 경기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렇다.
또 감독 백인천으로서 최강의 타자 백인천을 아끼고 말고 할 여유가 없을 만큼 MBC 청룡의 성적은 애매했거나 미흡했다는 점 그리고 순전히 '타자 백인천'에게만 집중해서 볼 때도 오직 타율을 높이기 위해 짧은 스윙을 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집계하지도 않았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수치들을 불러온다면, 그 해 그의 출루율 .502(희생 플라이를 제외하지 않는 오늘날의 집계 방식으로는 .497)와 장타율 .740은 모두 1위였을 뿐 아니라 오랜 기간 역대 최고 기록의 자리를 지켰던 '역대급' 기록에 해당한다. 그 두 가지를 합쳐서 산출하는, 오늘날 타자의 생산력을 표현하는 가장 신뢰도 높은 기록으로 통하는 OPS(On-Base plus Slugging)는 무려 1.237로 그것 역시 2015년의 에릭 테임즈 외의 누구도 아직 이르지 못한 기록이다.
대기록의 뒷면 그리고 더 깊은 면
프로 원년, 갑작스러운 창설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까지 겹치면서 선수층의 부족은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였고, 그것은 몇 가지 '말도 안 되는' 대기록이 수립되는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한 2, 3년쯤 차분히 시간을 두고 실업에서 프로로 전환된 것이었다면? 그래서 경기 수도 최소한 100 경기쯤 되는 시즌이었다면? 혹은 세계선수권대회와 겹치지 않아서 명실상부 정상급 선수들이 모두 함께 참여한 리그였다면? 그런 '정상적인' 상황이었다고 해도 백인천은 과연 4할 타율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격왕을 차지하던 7년 전이었다면? 혹은 일본 무대에서 생애 최고타율을 기록했던 3년 전이었다면? 게다가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겸비한 일류 수비수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고, 굳이 감독이라는 부담까지 질 필요가 없었던 좀 더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때의 백인천이 기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말도 안 되는' 기록이 어떤 종류 어느 정도의 것이었는지도 역시 여러 갈래로 상상해볼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통해 한국인 최고의 타자였던 백인천은 그 기념비를 1982년의 한국프로야구사에 세워놓았고, 그것은 지난 40년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수많은 후배 타자들이 바라보며 도전하는 목표선이 되었다.
그 내막을 파고들면 기록의 빈틈도 분명히 보이겠지만, 좀 더 파고들면 미처 드러나지 않은 위대함 또한 함께 딸려 나올 것이다. 좋건 싫건, 기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그런 쓸모를 가진 것이며 그런 가치를 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