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23 14:22최종 업데이트 22.03.3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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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서울 가든호텔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9.3.15히스토리 채널
 
허구연 MBC 해설위원이 제24대 KBO 총재로 선임된다. 지난 3월 11일 KBO 이사회와 사무국에 의해 단독 후보로 추천된 허구연 위원은 25일까지 서면으로 진행되는 구단주 총회의 의결 과정에서 4분의 3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총재로 추대된다. 구단주들의 대리인 격인 대표이사들의 의결 단위 이사회에서 이미 단독 후보로 추천된 후보자가 총회에서 거부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야구계에서는 야구 원로 단체인 일구회와 은퇴선수협의회는 물론이고 현역 선수 단체인 선수협의회에서도 일제히 환영 성명을 발표하는 등 최초의 야구인 출신 총재 탄생을 경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전히, 가장 대중적인 야구인

허구연 위원은 프로야구가 창설된 1982년 MBC 해설위원을 맡으면서 KBS의 하일성 위원과 더불어 TV 야구해설을 양분해왔다. 특히 인터넷이 없던 시절, 정보유통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공중파 TV의 야구해설가 두 사람이 야구팬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야구 용어부터 기본적인 전술, 선수와 지도자의 특징과 성향과 개인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야구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들은 두 해설위원에 의해 전달되거나 해석되어 유통되었다. 최소한 오늘날 40대 이상의 야구팬들은 좋건 싫건 해설가 허구연과 하일성을 통해 야구를 배웠다.


특히 하일성 위원의 해설이 서민적이고 직설적이고 감각적이었다면, 허구연 위원의 해설은 지적이고 논리적이었다. 하일성 위원이 과감한 예측과 다양한 일상생활의 비유를 통해 야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했다면, 허구연 위원은 비속어화한 야구 용어를 바로잡거나 재정의하고 해외야구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며 야구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켰다.

선수로서 무명이었던 하일성 위원과 달리 허구연 위원은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라는 점도 대조적이다. 그는 경남고와 고려대를 거쳐 한일은행과 국가대표팀 2루수로 활약했고, 부상으로 일찍 은퇴한 뒤에는 학업에 전념해 대학에서 법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5개 스포츠 전문 채널들을 통해 프로야구 전경기가 중계방송되고 인터넷을 통해 야구팬들이 직접 정보를 얻고 가공하고 유통하는 오늘날, 야구해설가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으며 허구연 위원의 영향력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올림픽이나 WBC 등의 국제대회나 한국시리즈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허구연 위원의 해설은 여전히 높은 대중적 관심을 끌어낸다. 심지어 '대쓰요(됐어요)' '배나구(변화구)' '식샤(식사)' 같은 특유의 경상도식 발음마저 유행어를 만드는 그는 아직도 대중적인 야구인 중 한 명이며 한국 야구를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 중 하나다.
 
허구연 위원이 운영중인 유튜브 채널 '구독허구연'의 대문 사진구독허구연
    
선수와 해설가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온 허구연 위원에게 있어서 유일한 '흑역사'로 꼽히는 것이 감독 시절이다. 허구연 위원은 1986년 프로야구 감독에 취임했지만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해임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브라운관으로 복귀했지만, 그의 감독 시절 1년은 야구에 있어서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어 왔다.

그렇다면 '허구연 감독'은 왜 실패했던 것일까? 단지 이론과 실제가 다르기 때문이고, 해설위원으로서 허구연이 가지고 있던 해박한 야구지식이 야구팀을 운영하는 데는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일까? 혹 그밖의 이유들은 없었을까?

청보의 새판 짜기와 34세의 해설자 허구연

1982년에 '꼴찌의 전설'을 남긴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3년 30승 투수 장명부를 앞세워 선두 경쟁을 벌이는 돌풍을 일으켰지만, 1984년에는 그 장명부가 태업성 부진에 빠지면서 다시 꼴찌로 복귀했다. 이번에는 냉탕인가, 온탕인가. 더욱 관심을 모았던 1985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개막전 딱 한 경기를 이긴 뒤로 무려 한 달 동안 내내 지는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 아직도 완전히 깨지지 않는 18연패 신기록의 작성이었다.

4월 30일에 최계훈의 완봉 역투에 힘입어 4대 0으로 간신히 2승째를 올리면서 연패기록을 끊긴 했지만, 바로 그다음 날인 5월 1일, 구단 운영권이 청보로 넘어가는 매각이 발표됐다. 그리고 전기리그의 잔여 경기들은 삼미 슈퍼스타즈 이름으로 치렀지만, 후기리그부터 청보 핀토스로 이름과 유니폼이 바뀌었고 그 해 시즌이 끝난 다음, 청보 그룹의 본격적인 재설계가 이루어졌다.
 
청보 핀토스 로고청보 핀토스
   
재설계의 뼈대는 코칭스태프의 교체와 거물급 선수의 영입이었다. 우선 감독 및 코치들을 전원 해임하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했다. 인천 야구를 대표해온 두 간판인 박현식과 김진영 그리고 그들이 각각 대표하던 동산고와 인천고 출신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인천 연고 프로야구팀에서 제거되는 순간이었다.

그 대신 영입된 것이 바로 만 34세 7개월의 젊은 TV 해설자 허구연이었다. 그보다 더 젊은 감독은 아직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 선수 수명이 길어져 어지간한 수준의 선수라면 그 나이까지는 은퇴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허구연 감독은 부산 지역의 야구 선배인 김명성 투수코치를 영입하고, 선수 중 최고참인 김무관을 은퇴시켜 타격코치로 기용했다. 또한 구단은 경험이 부족한 감독을 보좌하기 위해 베테랑 코치들을 영입했는데, 1973년 장효조 등을 이끌고 대구상고를 전국대회 3관왕으로 이끌었던 전설적인 지도자 강태정 수석코치와 해태와 MBC에서 각각 코치를 지낸 유남호, 한동화였다. 김무관을 제외한 네 명의 코치는 훗날 모두 프로야구팀 감독을 지내게 된다.

그리고 김정우 구단주가 직접 허구연 감독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장명부 급'의 재일동포 투수를 영입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발로서는 다승과 탈삼진 2관왕을 경험했고, 마무리 투수로 전업해서는 세이브왕에 오른 경력이 있는 사이드암 투수 김기태였다. 그리고 또 다른 사이드암 투수 김신부도 함께 영입했는데, 그도 나름 일본 프로야구 1순위 지명자였다.

사이드암으로만 두 명을 영입한 점에서는 스타 해설가 출신다운 날카로움이 엿보인다. 장명부나 김일융의 빠른 공에 주목했던 팬들과 달리, 해설가 허구연은 그 선수들의 성공 비결로 변화구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국내에 수준 높은 잠수함 투수가 없었고, 타자들의 대처능력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감독의 실수와 구단의 무리수

그런데 믿었던 김기태 투수가 명성에 비해 노쇠했고, 시즌 초 적응에도 어려움을 겪으며 부진했던 것이 문제의 출발이었다. 1984년 롯데의 최동원처럼 전천후로 승리를 챙겨주기를 기대했던 김기태가 첫 두 경기에서 3이닝 5 실점하며 승리를 날리면서 감독의 시즌 구상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개막 7연패 후 1승 하지만 또다시 연패와 연패들. 그러다 보니 계획적인 투수진 운영은 불가능해졌고, 그나마 자기 역할을 하던 투수들에게 과부하가 걸렸다. 4월 말까지 23경기 중 10경기에 나와서 661구를 던진 정은배가 언론 인터뷰 중에 '선발로 등판하면 이기든 지든 사나흘은 휴식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허구연 감독은 '팀 사정이 어려워서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답할 정도의 무리였다(경향신문 1986년 3월 29일 자). 정은배는 이후 부진에 빠지며 시즌 2승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서 5월 12일까지 전적이 8승 23패였고, 기대 이하의 성적은 자연스럽게 내부 분열로 이어졌다. 선수들 사이에서는 전임 김진영 감독 때가 나았다는 이야기들이 말버릇처럼 오갔고, 고참 코치들은 각자 진단과 처방을 내놓기 시작했다. 구단주는 감독 요구대로 영입한 거물 재일동포 투수들이 부진한 것을 계기로 감독을 불신했다.

그 시점에서 구단주가 결단을 내리는데, 그것이 결정적 한 방이었다. 전기리그가 한창 진행 중인 5월 중순에 갑자기 허구연 감독을 일본으로 연수를 보내 버리고 강태정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기용한 것이다. 당시의 기사들은 대부분 그것을 감독 경질 절차로 이해했다. 그런 임시조치에 이어 조만간 감독 퇴진과 신임 감독 선임 절차를 밟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 한 달 뒤인 6월 13일에 허구연 감독이 복귀했고, 강태정 대행은 수석코치로 돌아갔다. 한 달 전 급작스런 연수 조치의 진의는 무엇이고 복귀의 명분은 무엇인지, 강태정 대행 체제에 대한 구단의 판단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는 팀의 실질적 지휘권이 누구에게 있고 어떻게 유지될 것인지에 대한 일체의 판단과 예상을 무너뜨리는 기이한 행보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또 한 달 반 뒤인 8월 4일에는 백인천 전 MBC 감독이 타격 인스트럭터로 영입됐다. 감독급의 인사를 팀 내로 들인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차기 감독으로 내정한 것이거나, 그럴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현직 감독을 견제하는 포석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강태정이라는 전설적인 고교야구 지도자가 강력한 차기 감독 후보로 버티고 있는 마당에 또 백인천이라는 거물급 감독이 들어온다는 건 허구연과 강태정 둘 다 구단주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백인천 감독은 허구연 감독의 직접적인 부탁에 응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허구연 감독이 강태정 수석코치를 견제하기 위해 백인천 카드를 활용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 청보 핀토스의 감독 자리를 놓고 굉장히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백인천 인스트럭터 영입과 어떤 방식으로 연관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사흘 뒤인 8월 7일에 결국 허구연 감독의 퇴진이 이루어진다. 당시 기사에서 허구연 감독은 '강태정 코치와의 불화설'에 관한 질문에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둘 다 이기기만을 바라진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멘트를 남겼다(경향신문 1986년 8월 7일 자).

결국 그 해 청보 핀토스의 성적은 32승 74패였는데, 그중에서 허구연 감독이 직접 지휘한 경기만 추리면 15승 2무 40패였고 강태정 대행이 지휘한 경기가 17승 34패였다. 그리고 그 32승 중 시즌 중반 이후 리그에 적응한 김기태·김신부 두 재일동포 투수가 기록한 것이 합쳐서 19승이니까, 허구연 감독의 안목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1986년 청보 핀토스의 신임 감독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우선 김진영 감독을 비롯한 인천 출신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쓸려나가는 걸 지켜본 인천 출신 선수들의 마음을 보듬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잠재적 감독 후보일 수도 있는 베테랑 코치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도 필요했다. 거기에 더해 적절한 성적을 내 감독을 향한 불신을 잠재우면서 시간을 벌어 체질을 개선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1년 혹은 한 달 안에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경험 없는 젊은 감독이 아니라 어느 명감독이었다면, 곧장 가능했을까?

그래서 그 해 벌어진 일들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모든 일에 개입하고 결정한 청보 그룹의 김정우 구단주에게 있다. 기존 지역 야구 인맥의 리더십을 일거에 해소해버렸지만,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시간과 시행착오의 여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지도자와 노련한 코치를 묶어놓으면 보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리더십을 혼돈에 빠트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한 달 만에 지휘권을 빼앗았다가 돌려주고 다시 뺏는, 일관성 없고 원칙 없는 결정으로 시행착오를 통해 개선할 가능성마저 완전히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1982년 삼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구단주의 이런 이상한 행태가 유독 인천에서만 두 번이나 일어났다는 것이 인천 야구팬들에겐 비극이었다.
 
청보 핀토스 감독 시절의 허구연한국야구위원회

허구연 감독도, 자신이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해 어느 만큼은 예상했던 듯하다. 그래서 감독 제의를 받았을 때 3년간의 시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고, 3년 계약을 관철했다. 하지만 3년 계약이 3년의 시간을 보장할 것으로 믿었다는 게 그 예상의 한계였다. 계약은 3년이었지만 주어진 시간은 결국 한 달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독이 팀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구성원들의 마음을 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단의 이해와 협조를 얻거나 그럴 수 없다면 구단의 개입을 차단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칼자루를 쥔 것은 구단이기 때문에 늘 어려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1986년의 허구연 감독은 싸울 힘도 없었고 그런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점이며, 청보 핀토스라는 구단이 어느 감독이든 상대하기 어려운 비상식적인 파트너였다는 점이었다.

'탈정부 비기업 총재'의 성패

그렇다면 KBO 총재의 자리는 어떨까? 아무래도 좀 다를 것이다. 허구연 총재의 경험과 위상과 능력치도 달라졌고, 또 총재에게 요구되는 리더십도 감독의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번에도 총재가 가진 것은 대중적인 인기와 여론의 지지뿐이고, 결정권을 가진 구단들과의 성공적인 관계 설정을 통해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점도 있다.

최소한 1990년대까지 KBO 총재는 정권의 대리인으로서 리그를 관할했다. 하지만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정부의 영향력은 점차 배제된 반면 구단들의 결정권은 강화되었으며, 위로부터 통제되지 않는 결정권자들 사이의 이해관계 대립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부와의 교감도, 특정한 구단과의 연계도 분명하지 않으며 스스로 재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첫 번째 KBO 총재인 허구연의 성패는, 그래서 절묘한 관계 설정과 지능적인 주도권 행사 여부에 달려있다. 감독 시절 실패의 교훈이 총재로서 어떻게 활용될지 지켜보는 것 또한 허구연 총재 시대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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