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역에서 안국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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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6년 전에 나온 위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대지 900평, 건평 120평 규모의 서울 종로구 가회동 177-1호에 살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가 강할 때였다. 또다시 세상이 뒤집히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을 수도 있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도 여전히 그는 친일의 결과물인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사망 7년 전인 1987년 11월 4일에 박흥식의 위 주택이 경매로 넘어갔다. 자금난의 결과였다. 낙찰가는 10억 3천만 원이었다. 그런데 위 기사가 나온 시점인 1988년 5월 18일 당시에는 그 집이 박흥식에게 돌아가 있었다. "박씨는 그 집을 대리인을 세워 다시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기사는 보도했다.
1987년 11월에 넘어간 집을 1988년 5월 이전에 도로 사들였다. 경매된 집을 도로 사려면 경매가보다 훨씬 높은 값을 치를 수밖에 없다. 1988년 시점에도 그가 상당한 자금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반이 해방 뒤에도 여전했다는 점은 1973년 뉴스에서도 나타난다. 그해 9월 1일 일본 소니사와 합작해 화신소니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9월 4일자 <매일경제> 4면은 "자본금을 10억 원으로 하여 화신 측이 51%, 소니 측이 49%를 출자"한다고 보도했다.
국민들은 박흥식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것을 원통해 했다. 그가 참회하고 사죄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위와 같은 경제력을 유지하면서 세상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사업에만 열중했다. 8·15 해방으로 타격을 받은 '박흥식 월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만 고민했을 뿐이다.
위의 <중앙일보> 기사는 "기업을 어떻게든 다시 일으키겠다는 의욕이 대단하다는 주변의 얘기다", "요즘 그는 잔여 재산목록과 설계도면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라고 전했다. 친일청산이나 참회·사죄 등은 안중에도 없는 나날을 이어갔던 것이다.
반성은 없다
그 같은 의식 세계는 그의 윤리적 둔감함에서도 나타난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자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의 생활비를 대준 일이 1950년대에 있었다.
박흥식과 접촉했던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은 1999년 10월 2일자 <문화일보> '비화(秘話) 내가 겪은 한국 외교 (15)'에서 "박씨는 그때 전범으로 스가모형무소에 복역하다 풀려난 기시 노부스케를 화신의 도쿄사무소 고문으로 위촉해 생활비를 돌봐주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 자신이 친일 행적 때문에 반민특위에 체포된 적이 있으므로 더욱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됐고, 또 기시 노부스케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을 리 없는 박흥식이었다. 그런 박흥식이 A급 전범의 생활비까지 대줬다는 것은 반민특위에 체포된 동안에 그가 반성을 했을지 원통해 했을지를 짐작케 한다.
기시 노부스케와의 인연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눈감아주고 위안부·강제징용·강제징병을 사실상 덮은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들이 체결될 때도 그는 기시 노부스케와의 인연을 활용했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사이의 친서를 전달하는 밀사 역할을 수행했다. '반성한 일본'이 아니라 '반성하지 않은 일본'의 영향력을 도로 끌어오는 데도 앞장섰던 것이다.
친일파들의 죄악이 8·15 해방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8·15 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들은 친일의 결과물인 영향력과 재산을 이용해 대한민국의 진보와 역사청산을 저해했다. 박흥식의 예에서 나타나듯이 그들 상당수는 예전처럼 분주하고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1호' 친일파 박흥식의 해방 이후 행적은 친일 문제가 과거지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임을 똑똑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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