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1978년 12월 27일 장충문화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약 3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딸 박근혜와 함께 취임식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통령 기록관
단독 출마해 "거의 만장일치"로 요식 행위를 밟은 박정희는 12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취임식을 했다. 이날 발행된 <매일경제> 7면 기사는 "겨레의 환희와 바람이 차분하게 내린 가랑비에 섞여 온누리를 적셨다", "시민들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된 이 민족의 경축일을 가족과 함께 마음껏 즐겼으며 전국 방방곡곡은 축제 분위기에 젖었다"라고 한 뒤 "박 대통령의 입장과 함께 1백 8명으로 구성된 국립교향악단의 <대통령 찬가>가 울려퍼졌으며"라고 보도했다.
시인 박목월이 작사하고 친일파 김성태가 작곡한 <대통령 찬가>는 "어질고 성실한 우리 겨레의/ 찬란한 아침과 편안한 밤의/ 자유와 평화의 복지 낙원을/ 이루려는 높은 뜻을 펴게 하소서/ 아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 빛나리라 길이길이 빛나리라"라는 1절 가사를 담고 있다. 박정희를 지상낙원을 건설할 메시아처럼 추앙하는 찬양가였던 것이다.
이렇게 칭송을 받던 이 시기, 박 정권은 근본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다.
외형은 굳건해 보였지만
박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을 봉쇄하고자 1974년 1월 8일부터 1975년 5월 13일까지 총 9건의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그리고 4년 반 동안의 긴급조치 제9호 하에서 800여 명을 구속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투쟁을 봉쇄하는 데는 실패했다.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자 영장 없는 체포까지 예고했지만,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규모 반 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도 반 유신 투쟁에 동조했다. 이 점은 1978년 대선 5개월 뒤인 그해 12월 12일 제10대 총선에서 증명됐다. 국회 의석 231석 중에서 유신정우회(유정회)가 77석, 민주공화당이 68석, 신민당이 61석, 민주통일당이 3석, 무소속이 22석을 가져간 총선이었다.
대통령이 추천한 후보들을 놓고 통대가 선출한 국회의원들은 유정회라는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사실상 박정희가 임명한 의원들은 유정회로 묶였던 것이다. 유정회를 제외한 직선 의원들만 놓고 보면, 공화당이 68석으로 신민당보다 7석 많았다.
하지만 투표율에서는 신민당이 앞섰다. 그해 12월 14일 자 <경향신문> 1면 좌단은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1.1%를 앞섰다"라고 보도했다. 민심의 향방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만했다.
국민들이 박 정권보다 야당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는데도, 공화당 68석에 유정회 77석이 더해져 박 정권이 국회를 압도적으로 장악하는 형국이 조성됐다. 그보다 앞선 7월 대선에서는 박 정권이 "거의 만장일치"로 승리했다. 정권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는데도 외형상으로는 굳건해 보였던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도사
박 정권이 속으로 썩어 들어가는 상황에서, 이 정권의 외형적 번영을 위해 뛰어다닌 종교인이 있다. 서두에 언급한 '도사'가 바로 그다.
이 도사는 박정희의 1978년 대선 승리를 위해 뛰어다녔다. 1973년 5월 13일 자 <대전일보> 광고란에 실린 홍보 팸플릿에 따르면 불교·기독교·천도교를 두루 섭렵한 것 같지만, 실상은 무속인에 가까웠던 최태민이 바로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