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독일통일 31주년 기념식에서 연설중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
Bundesregierung 영상 캡쳐
"필요없는 짐"
한 인간이 태어나 살아온 수십 년의 삶이 필요없는 짐으로 규정됐다. 구동독 사람들의 삶이 그랬다. 독재일지언정 교육을 받고 노동을 하고 개개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해온 이들의 삶은 통일 후 필요없는 짐이 되어버렸다. 개인의 삶을 존중하지 않은 통일은 수많은 동독인들에게 상처로 남았다.
그동안 수차례 그런 불만이 흘러나왔지만 이번 만큼 묵직한 메시지는 없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3일 독일 통일 31주년 기념식에서 메르켈 총리는 16년 총리 인생에서 가장 감정적이고 솔직한 메시지를 꺼내놨다.
"1990년 10월 3일은 자유와 평화의 독일 통일 기념일입니다. 이 자유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쟁취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통일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은 동독에서 그들의 권리와 자유, 다른 사회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 덕분입니다."
메르켈이 소속된 기민당(CDU)은 '독일 통일'을 당의 업적으로 평가해왔다. 1990년 통일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독일 통일의 총리' 혹은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불렸다. 역사는 일인자만을 기억하기에, 독일 통일이라는 업적 또한 콜과 콜이 소속된 기민당의 성과가 되었던 것이다.
장벽이 붕괴되기까지 새로운 세상을 외치며 목숨을 걸고 투쟁한 동독인들이 있었지만, 그 장면은 늘 동독 지역에서만 기억될 뿐이었다. 메르켈은 확실히 했다. 동독인들이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평가절하되는 동독인의 삶
"저는 제 개인적인 사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말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이 CDU의 역사를 다룬 여러 논문을 모아 발행한 책의 한 구절에서 저를 언급한 내용입니다.
'동독 시절 35년 이력이라는 필요없는 짐(Ballast)을 가지고 전환기(장벽 붕괴 후)에 CDU에 들어온 그녀는 당연히 서독에서 초기부터 사회화된 CDU의 특성을 가질 수 없었다.'
독재와 억압적 국가 체제하에서의 35년 개인적인 삶, 동독 이력이 '필요없는 짐'이라고요?"
메르켈은 되물었다. 메르켈은 "총리로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동독 시민으로서, 동독에서 살았던 1600만 명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메르켈은 통일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월한 서독 삶의 양식으로 동독을 평가절하는 통일 독일의 현재를 비판했다.
이어 자신을 두고 '태어나지 않고, 속성으로 학습된 독일인'이라고 평가한 언론 보도도 소개했다.
"오리지널과 날마다 소속을 새로 증명해야 하는 학습된 사람, 두 종류의 독일인과 유럽인이 있는 것일까요?"
메르켈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표정은 살짝 일그러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경계인과 이방인의 삶이 스쳤다. 독일인과 비독일인의 경계, 이 땅에서 태어났는데도 '오리지널'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속과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삶. 똑같이 생겼는데도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부정당하는 삶. 메르켈도 어쩔 수 없는 '오씨'(OSSIS, 서독 주민들이 동독 주민들을 비하하며 부르는 말)였던 통일 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