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그런데 이런 평화 혹은 소강 국면을 깬 것은 무왕의 즉위다. 신라 왕실의 사위가 즉위한 뒤부터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격이 본격화됐다. 이렇게 된 이유를 역사학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무왕과 김용춘의 경쟁의식에서 찾는다. 신채호는 이들의 주도 하에 벌어진 양국 전쟁을 '동서(同壻) 전쟁'으로 명명한다.
무왕 즉위 3년차인 602년, 무왕이 신라 아막성(전북 남원)을 공격했다. 이것은 양국이 전쟁 국면에 돌입하는 신호탄이었다. <조선상고사>는 무왕이 이렇게 한 것은 김용춘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는 즉위 후에 김용춘을 죽이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쳤다. 김용춘은 처음에는 뒤에 숨어 진평왕의 진영에서 참모 역할을 하다가 나중에는 내성사신(궁궐 사무 관장)으로 대장군을 겸직하고 전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 인해 상호 간의 악전고투가 거의 매년 벌어지니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이다."
양국관계가 험악해졌다는 점은 전쟁의 발발 횟수뿐 아니라 신라 사회의 분위기에서도 감지된다. 유독 이 시기 신라에서는 전쟁과 관련된 영웅들이 많이 배출됐다. 진평왕 때 자기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에 나간 동네 청년 가실(嘉實)과의 약혼을 끝까지 지킨 설씨 여성(설씨녀), 백제와의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귀산·찬덕·해론·눌최 같은 신라 무사들이 영웅으로 부각됐다.
신라에서 영웅이 많이 나온 것은 백제군의 전력이 우세해진 상황에서 신라인들이 극력을 다해 싸웠기 때문이다. 전쟁에 이겨서 영웅이 된 게 아니라 장렬하게 전사했기 때문에 영웅이 된 것이었다. 신라군이 처절하게 싸웠다는 것은 상대편인 백제군도 극력을 다해 전투에 임했음을 뜻한다. 분위기가 이렇게 험악해진 이유에 관해 신채호는 무왕과 김용춘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의 탐욕적인 이기주의의 충돌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내의 민심을 자극했다. 또 죽기를 각오하는 무사들을 끌어들이고자 명예와 작록(爵祿, 벼슬과 녹봉)을 앞세웠다. 그래서 한편에는 비애로 슬피 우는 인민들이 있고, 한편에는 공명에 춤추는 장수와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동서 전쟁에서 공격성을 더 많이 보인 쪽은 무왕이다. 이 상황을 발판으로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은 신라를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김유신이라는 명장으로 인해 이따금 신라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660년에 당나라군이 신라군과 연합작전을 벌이기까지는 백제가 대체로 우세를 잡았다.
하지만 무왕과 김용춘의 대결이 무왕의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다. 무왕은 '인적 동군연합'의 군주가 되지 못했다. 신라 왕위는 선덕여왕의 차지가 됐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등극으로 입지가 강해진 쪽은 김용춘이다. 김용춘도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신라 왕권과 관련해서는 무왕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거뒀다.
백제 사위 자극하지 않으려는 고육책
신채호는 진평왕이 김용춘을 택할 수 있었는데도 선덕여왕을 택한 이유와 관련하여 "덕만 즉 선덕대왕을 불러 왕태녀(王太女)로 삼고 김용춘을 중용하여 장래 명목상 권위는 선덕에게 있을지라도 실권은 김용춘에게 있도록 했을 것"이라며 "덕만에게 왕위를 준 것은 물론 서동의 감정을 자극하기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사위 김용춘에게 왕위를 넘기면 또 다른 사위인 무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진평왕이 선덕여왕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진평왕의 조치는 김용춘이 왕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되 무왕을 자극하지 않는 절충적인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대결은 불완전하나마 김용춘의 승리로 끝났다. 김용춘은 직접 집권하지는 못했지만 선덕여왕의 배후에서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김용춘의 아들 혹은 조카인 김춘추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뒤이어 신라 왕통을 차지했다. 이런 면에서도 김용춘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 왕실은 석탈해·김알지 같은 외부세력에 대해서는 사위나 양자로 들이고 왕위계승권을 준 반면, 백제 무왕에 대해서는 사위로는 받아들이되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신라가 비록 열세나마 백제 군사력에 맞설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석씨·김씨가 얻은 성과를 부여씨가 얻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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