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인권주일연합예배에 참석한 김대중 내외.

1978년 인권주일연합예배에 참석한 김대중 내외. ⓒ NCCK아카이브


지난 24일과 25일 CBS TV에서 특집 다큐 2부작 <다시 쓰는 백년>이 방송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획된 <다시 쓰는 백년>은 NCCK 중심으로 한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 등 기독교 사회 운동 역사를 재조명 했다.

<다시 쓰는 백년>의 제작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의 기독교 사회 운동 방향에 대해 듣기 위해 궁금해 2부 방송한 직후인 25일 서울 목동 CBS 사옥에서 반태경 PD를 만났다. 다음은 반 PD와 나눈 일문일답 정리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 사회운동

- 방송 끝낸 소회가 어때요? 오랜만에 방송했는데.
"제가 노조 전임자로 2년 동안 제작을 쉬다가 작년 여름에 복귀해서 9월쯤부터 기획했던 작품이에요. 1년간의 작업으로 방송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어서 너무 뿌듯하고 감사하고요. 어떤 평가가 나올지는 지켜봐야 되겠지만 혹시라도 비슷한 작업을 우리 회사가 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잘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 <다시 쓰는 백년>은 어떻게 제작하게 되었어요?
"작년 6월에 노조 전임을 마치고 현업으로 복귀했어요.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당시 국장 선배가 NCCK 10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제 전작들이 기독교 사회 운동을 직간접적으로 다뤘던 작품이었고,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기획은 계속 고민했던 아이템이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 그럼, NCCK에 대해 어떻게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제가 <다시 쓰는 루터로드>나 <북간도의 십자가>, <그 해 봄> 같은 전작들 만들 때 NCCK가 한국 기독교 개신교 민주화 운동에 큰 울타리에였다는 정도만 얼핏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70~80년대에 한국기독교회관이 종로5가에 있는데 '종로5가'가 민주화, 인권 문제를 고민하는 개신교를 상징했거든요. 그 정도만 알고 있었고 NCCK에 대해 깊숙하게 아는 부분이 없었어요."

- 1부와 2부 콘셉트가 다른 거 같아요. 1부는 배우 강신일 씨가 내레이션 맡아 시사 프로그램 같았는데 2부는 싱어송라이터인 황푸하 목사가 내레이션 맡아 음악 다큐 느낌이었거든요. 이렇게 한 이유가 있을까요?
"80년대까지는 NCCK가 화려한 역할을 했어요. 그 화려했던 역사는 정통 역사 다큐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배우 강신일 씨를 삼고초려 해서 역사 다큐 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NCCK 영향력이 점점 쇠퇴해지고 활동가들도 없어지는 상황이잖아요. 그걸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 부분은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강신일 씨가 아닌 지금 활동하고 있는 청년을 섭외하려고 했었고, 제일 처음 후보자가 황푸하 목사였습니다. 황푸하 목사는 목회도 하시고, 기독교 청년 활동도 하시고, 노래도 하시잖아요. 황 목사의 활동 모습이나 노래를 삽입하는 다큐로 1부와 차별성을 두자는 기획 의도였습니다."

- 한국 초기 기독교가 들어온 이야기부터 시작했는데 이렇게 구성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924년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설립됐는데, '이제 공의회를 만듭시다'라고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초창기부터 왜 당시 서구에서 오는 교회 선교사들이나 한국의 지도자들이 일치에 대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밝혀야 되거든요."

- 1924년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가 사회 운동을 시작한 건가요?
"초창기 개신교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얘기하는 건 맞는 것 같고, 1920년대부터 미국에서 사회 복음 운동이 생겨나 '영혼 구원만 하지 말자, 우리가 사회를 바꿔야 된다'라는 흐름이 생기거든요. IMC라고 국제선교협의회라는 대회가 있었는데, 1928년에 한국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IMC 대회에 가서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조금씩 바꿔나가고 우리 사회를 하나님의 정신으로 바꿔나가는 데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돌아옵니다. 그런 흐름으로 '사회 신조'라는 게 나오게 된 거죠."

 CBS 특집 다큐 <다시 쓰는 백년> 연출한 반태경 PD

CBS 특집 다큐 <다시 쓰는 백년> 연출한 반태경 PD ⓒ 이영광


기독교 사회 운동의 한계들

- 1930년 발표된 사회신조는 지금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던데 그땐 더 어려웠을 것 같아요.
"약간 선언적인 의미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고요. 공창 폐지하고 남녀 평등 하고 노동조합 설치 하는 게 지금 와서도 파격적인데 그때는 되게 파격적이었을 것 같아요. 신간회 같은 좌우 합작 운동이 있었고, 교육 받은 청년들은 약간 사회주의에 대한 동력이나 이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혁명적인 개혁은 말고 우리는 성서에 기반해서 이렇게 개혁해야 된다'라고 생각해서 나온 게 사회 신조였습니다."

- NCC라면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거로만 아는데 이승만 정권과 같이 했다는 게 의외인 거 같아요.
"유교 국가에서 엘리트 유학파들의 발언권이 커지고 또 미국에서 유학한 개신교 장로인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을 하는 와중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권에 밀착했던 거에요. 아쉬웠던 건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주적인 행동을 할 때 예언자적인 쓴소리를 해야 될 텐데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무 얘기는 안 했다는 거죠. 그걸 가감 없이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 1973년에 있었던 부활절 기념 예배가 기독교 사회 운동사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유신 정권이었고 긴급 조치가 발효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신독재를 반대한다고 했죠. 그때 박형규 목사님이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플래카드를 준비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 생겨난 목요 기도회가 그때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있던 공간을 마련해줬다는 거죠. 실제 우리가 역사책에서 봤던 동일방직, YH무역 같은 노동 운동하시는 분들까지 다 그 자리에 함께했다고 합니다."

- 민주화 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중요했던 거로 알아요.
"그때는 NCCK에 서구 교회에서 지원금을 많이 줬어요. 그것들이 NCCK 활동가들을 양육하고 재생산하는 기금이었지만 그게 실제로 민주화 운동에 시드머니로 많이 사용됐다고 하더라고요. 또 하나 한국교회가 WCC와 연관 됐고 최근까지도 '한독교회협의회'라고 독일 교회와 교류가 있는데 거기서 우리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져주고 탄압받고 있으면 와서 보호해 주고 항의서한 넣어줬던 기록들이 있더라고요."

- 목요기도회를 언급했잖아요. 1974년 목요기도회가 시작되는데 거기엔 비기독교인도 왔나 봐요?
"그렇죠. 그때를 회상하셨던 김상근 목사님이 설교하는 장면을 넣었는데 구속자 가족이든 교회를 다니든 안 다니든 술 취한 사람이든 아니든 다 와서 다 문을 열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뜻을 모았다. 저는 그게 기독교와 에큐메니컬 운동이 가져왔던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해요."

- 역사 편찬 위원장이었던 이만열 교수는 NCC가 1980년대까지 우리 사회의 나아갈 길을 알았다고 하잖아요. 반대로 말하면 지금은 모른다는 의미 같거든요. 왜일까요?
"일단 NCCK로 대표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세력이나 실력이 힘이 많이 빠진 것도 하나 있고요. 그리고 어쨌든 시민사회 운동이 발전했고, 다큐에서 직접 다루지 못했지만 환경운동연합도 결국 NCCK 산하기관에서 시작했다고 보시면 되고요. 여성 운동, 장애인 운동 다 NCCK를 비롯한 기독교 운동이 모태가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만열 교수 말씀으로는 어쨌든 NCCK가 광복 50년이 됐던 1995년을 평화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선포했는데, 그때까지는 88 선언으로 대표되는 NCCK의 아젠다가 먹혔다고 하는데 그 이후 NCCK의 지도력이나 영향력이 빠지기 시작한 거죠."

- 세월호와 교회에 대한 얘기도 나와요. 세월호 참사 당시 한국교회 민낯을 보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목사들의 막말도 있었지만, 또 유가족 옆에 있던 것도 교회잖아요. 한국교회에 세월호는 어떤 의미일까요?
"세월호 유가족들, 세월호와 함께했던 분들에게 가장 모진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당시 개신교 일부 개신교였다는 게 명확하지만, 10년 동안 꾸준히 손잡았던 것도 기독교인들이었거든요. 올해가 마침 NCCK 100주년이기도 하지만 세월호 참사 10주기였잖아요. 매월 셋째 주 목요일에 세월호 기억공간 앞에서 기도회를 여는데 이른바 에큐메니컬 권과 이른바 복음주의 권리와 서로 힘을 합쳐서 서로 번갈아서 해요. 되게 신기하고 좋았어요.

저는 교회 일치라는 게 이른바 에큐메니컬 소속 회원 교단만 교회 일지들하고 연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고통 앞에 선 사람들과 함께 위로하고 불의에 맞서는 목소리를 함께 내는 게 저는 진정한 교회 일치고 하나님의 정의 평화를 위한 교회 일치라고 생각하는데 세월호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그걸 봤었습니다."

-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이 모래성이라는 얘기가 나오던데.
"에큐메니컬 운동뿐만 아니라 요새 대부분의 운동이 모래성인 게, 운동의 핵심 활동가들이 재생산이 안 되고 젊은 사람들이 없어요. 그리고 인터뷰에 나오지만 교회협의회 활동이면 교회에서 인정 받아야 되는데 교회에서 인정과 지원을 못 받아요. 목회자들이 여러 에큐메니컬 활동을 하셔도 그분들이 주일에 가면 주일 강단에서 교우들에게 신자들에게 에큐메니컬에 관련된 얘기는 못 하는 경우가 파다하거든요."

- 왜요?
"모르겠어요. 다큐의 결론은 우리가 다시 교회로 돌아가 골방에서 통성 기도하고 회개 기도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그보다 교회로 돌아가서 우리의 정신을 펼치는 걸 마련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황푸하 목사를 2부의 주인공으로 한 게 황 목사가 '옥바라지선교센터'라는 청년운동 단체의 대표격인 운영위원장이고 새민족교회 담임 목사를 하면서 교회에서 실제로 에큐메니컬 운동/사회운동을 풀어나가려고 노력하는 청년 목회자거든요. 그러니까 황 목사가 정답이고 황 목사 같이 가자는 게 아니라 밖에서 활동하는 것과 교회에서 활동하는 것이 이원화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남은 과제들

 CBS 특집 다큐 <다시 쓰는 백년>의 한 장면

CBS 특집 다큐 <다시 쓰는 백년>의 한 장면 ⓒ CBS


- 앞으로 NCC와 기독교 사회 운동의 과제는 뭘까요?
"지금 청년층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요. 청년층으로 따지면 10%도 안 될 것 같아요. 모든 교회가 다 그럴걸요. 그리고 학창 시절에 전 학생회는 학생운동을 했었고 이 기자님은 기독교 활동을 하셨겠지만 거기서 민주주의의 교육을 받아 가는 게 있잖아요. 최근에는 그런 풍토도 많이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에 주요 교단 청년연합회도 들어가 있는데 그 청년연합회도 거의 EYCK 활동을 안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한국 기독학생회 총연맹(KSCF)은 원래 각 대학 별로 기독학생회가 다 있었거든요. 그걸 SCA라고 해요. 지금 기독교 학생회도 다 망해 있고 그 전설적인 KSCF의 회원들이 몇십 명 수준이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에큐메니컬 정신에 동의할 수 있는 청년들이 계속 만들고 키워나가는 거에 다시 집중해야 돼요.

저는 이 다큐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고민하는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의 교과서 같은 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제일 무서운 게 뭐냐면 몇 년 뒤 제 다큐가 NCCK라는 조직의 마지막을 기록한 거로 될 것 같은 거예요. 그게 겁 나요."

- 제작하며 느낀 점은 뭘까요?
"'에큐메니컬'이 뭐냐고 누군가 저에게 물어보면 얘기 못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얘기하신 정의와 평화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친구들을 늘려가는 과정이 에큐메니컬 정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원래 1년 전후로 제작하면 그 조직에 대한 애정이 생겨야 되는데 NCCK라는 조직 자체에 대해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조직이 갖고 있었던 에큐메니컬 정신. 정의 평화, 생명, 창조, 질서의 보존을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와 호흡하려고 했던 이 정신은 계속 유지되면 좋겠어요. 그래야 지금 욕먹고 있는 한국교회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반태경 다시쓰는백년 한국기독교회회협의회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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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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