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재판 3.0> 포스터

<기후재판 3.0> 포스터 ⓒ SIEFF

 
아시아 최초로 제기된 기후소송이 마지막 공개변론을 마치고 재판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청소년 19명이 낸 기후소송을 포함해 시민단체와 영유아 등의 이름으로 제기된 소송 4건을 묶어 함께 심리하고 있는 상태다. 법으로 명시한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이행계획이 미래세대를 포함한 시민 기본권을 보호하지 못해 위헌이란 게 소송의 이유다.
 
아시아 최초라고는 하지만, 세계적 시각에서 보자면 기후소송은 하나의 트렌드라 해도 좋을 정도다. 2015년 전 세계 195개국이 조인한 파리협정 뒤 유럽과 미주 등에서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묻는 소송전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영국 런던정경대 그랜섬 기후변화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현재까지 제기된 기후소송만 2300여 건에 이른다.
 
특히 2013년 네덜란드에서 제기된 이른바 '우르헨다 소송'은 전 세계적 기후 및 환경소송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2015년 첫 판결을 받아낸 우르헨다 소송은 6년여의 법정싸움 끝에 2019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판결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법원은 네덜란드 정부에게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를 25% 감축할 것을 명령했다. 구속력 있는 구체적 감축목표를 법원이 정한 것이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법조계에선 이 재판을 지난 반 세기 전 세계 모든 재판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는 이가 많았다. 소송을 수행한 변호사 로저 콕스가 일약 세계적 유명인사로 떠오른 건 물론이다.
 
국경을 넘어 대동소이한 법 원칙이 유지되는 세상이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사적자치 등의 원칙을 공유하는 국가들에서 비슷한 소송이 줄을 이은 건 자연스런 일이다. 우르헨다 소송의 논리를 그대로 빌려다 파리협정 등을 근거로 국가가 보다 실효성 있는 변화를 보이길 촉구했다. 옆 나라 벨기에를 시작으로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유사 소송이 제기됐다. 한국도 그중 하나다.
     
기후재판의 시대, 법으로 세상을 바꾸다
 
제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ESG: 자본주의 대전환' 섹션을 마련해 <기후재판 3.0>을 초청 상영했다. 역사적인 기후 재판을 이끈 변호사 콕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환경문제에 관심이 깊은 벨기에 기후활동가 닉 발타자르가 연출했다. 57분의 중편 다큐멘터리는 2015년 있었던 우르헨다 소송 첫 판결부터 대법원 최종 승소, 벨기에와 프랑스 등 주변국의 유사 소송 등의 사례를 함께 담아 이들의 선구자적 행적을 기록해나간다.
 
발타자르는 저의 무력감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이 시대 많은 기후활동가들이 그러하듯 그 또한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로부터 환경문제에 눈을 떴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많은 이들처럼 좌절을 겪는다. 제가 무엇을 하더라도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인류에게 제동을 걸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가 실의에 빠진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네덜란드 변호사 콕스와 대면했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생각이 깊이 잠들어 있던 열정을 깨울 만큼 신선했다는 것이다.
 
콕스의 생각이란 바로 이것이다. 그는 법률가답게 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인류가 처한 암담한 상황 또한 법률적 관점으로 타개해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직접 저술한 < Revolution Justified >이란 책에서 법을 통해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실제적 변화를 이끌 수 있음을 주장한다. '지금 법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이유'란 부제는 그의 이 같은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환경에 대한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묻다
 
 <기후재판 3.0> 스틸컷

<기후재판 3.0> 스틸컷 ⓒ SIEFF

 
2015년 조인된 파리협정이 구체적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건 그에게 다행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정부가 협정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입증하기만 하면 될 일이니 말이다.
 
콕스를 필두로 5명의 변호사가 모여 팀을 이뤘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가 내놓은 보고서가 있었고, 이 보고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기후상승으로 해수면이 올라가고 생태계가 파괴되며, 산사태나 가뭄 등 이상 현상이 거듭 발생하는 건 이미 현실이었다.
 
그들은 네덜란드 정부의 협약 이행의지가 박약해 위기에 대응할 수 없으므로, 목표치를 훨씬 초과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대폭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정부를 고소하고 공개재판 과정에서 판사를 비롯한 대중에게 과학자들의 연구를 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얼핏 정부에 대한 고소가 공격적 행위로 풀이될 여지가 없지 않지만, 콕스는 현대사회에서 법정만이 검증된 발언으로 논의해나갈 수 있는 장이라고 믿었다.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이 정부가 온실가스를 1990년 대비 25% 감축해야 한다고 판결한 순간 콕스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는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기후소송이 제기되고 제 나라 정부의 행동을, 법제를 바꿔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독일에선 올라간 해수면으로 땅을 잃은 젊은 농부들이, 프랑스에선 스타들이 일어나 제 나라 정부를 법정에 세웠다. 어느 나라에선 젊은이들이, 어느 나라는 농부가, 어느 나라는 활동가, 또 다른 나라는 유명인들이 앞장서 소송을 이끌었다.
     
굴지의 석유기업 쉘을 패소시킨 변호사
 
네덜란드 대법관은 판결문을 낭독했다. "현행 정부의 감축수준으로는 대재앙이 올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악화는 끔찍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극한 폭염이나 가뭄이 발생하고 극한의 홍수가 일어나고 해수면이 상승할 것이다. 지구온난화는 기후위기 임계점으로 이어져 기후가 갑작스럽게 극적으로 변할 것이다. 이 모두는 네덜란드를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의 삶과 행복에 위협을 초래한다"고. 이것이 그들이 환경단체의 손을 들어 정부의 책임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인정한 근거다.
 
콕스는 환경을 파괴하는 여러 업체 가운데 쉘을 타깃으로 삼아 소송전을 이어갔다. 쉘은 1907년 네덜란드 석유업체 로얄더치페트롤륨과 영국 운송업체 쉘이 합병해 만들어진 다국적 기업이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다국적기업인 쉘은 지난 100여 년 간 세계 곳곳에서 유정을 개발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한때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대한 연구도 병행했으나 현재는 석유에 집중하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자국인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석유회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다. 콕스의 장인은 쉘에서 오래 일한 직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콕스는 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바탕으로 환경파괴에 쉘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해 승소판결을 받아낸다. 쉘을 상대로 승소할 수 있다는 건 토탈이나 BP 같은 굴지 기업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쉘은 초호화 변호인단을 구성해 방어에 나서고 이들의 재판 과정이 다큐 안에 흥미롭게 담긴다. '사회 전체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기후변화의 위협은 쉘 혼자의 책임이 아니다. 석유와 가스의 사용은 사회의 기능에 필수적이다'라고 주장하는 상대 변호인단의 논리는 최신 과학 데이터로 무장한 콕스 앞에 판판이 깨어져나간다. 이들이 준비한 예상 질문 백여 가지가 무색할 만큼 쉘 측의 안이한 주장이 헛웃음을 자아낸다. 법원은 마침내 콕스의 손을 들어준다.
     
모두가 불가능하다 했던 길, 그러나 현실이 됐다
 
 <기후재판 3.0> 스틸컷

<기후재판 3.0> 스틸컷 ⓒ SIEFF

 
법을 통해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콕스의 믿음이 거듭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이 놀랍다. 콕스 이전에 많은 이들이 법원을 가진 자들이 승리하는 무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쯤으로 여겼던 탓이다. 그러나 법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은 그의 승리는 전 세계적 기후위기 소송 붐으로 이어진다. 가짜뉴스의 범람으로 진실을 가려내지 못한 언론의 실패가 법원에서만큼은 반복되지 않는다. 검증된 사실로 싸우는 마지막 무대가 법정이란 콕스의 믿음은 그대로 사실이 된다.
 
<기후재판 3.0>이 훌륭한 다큐라고는 말하기 어렵겠다. 콕스와의 개인적 인연과 환경운동에 대한 관심으로 착수한 작업은 의미는 있을지언정 매력적인 콘텐츠로 묶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에 비해 발타자르의 연출적 재능이 부재하단 점, 특히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과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의 차이와 의미, 또 파급을 효과적으로 구분해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게 다가온다.
 
담긴 내용을 깊이 이해하는 이에겐 새로움이 없어 아쉬울 테고,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이라면 중구난방의 구성이 혼란을 더할 게 분명하다. 좋은 내용을 가지고서도 표현에 한계가 역력하니 긍정적인 면보다 실망을 크게 가질 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시대 더없이 유효한 이야기란 점에서 가치가 있다. 정부의 부족한 기후 위기 대응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헌법소원이 제기된 상황에서, 한국을 넘어 세계적 흐름을 파악할 귀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또한 탄소배출권 거래제 등 유명무실한 환경 관련 정책을 시행 중인 우리의 현실이 세계적 기준치에 크게 미달해 있단 점에서도 각국 법원과 정부의 기민한 대응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포스터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포스터 ⓒ SIEFF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SIEFF 기후재판 닉발타자르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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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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