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깜빡깜빡> 스틸컷

영화 <깜빡깜빡>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아버지, 저 이제 엄마 기일에나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방바닥을 혼자 기어 다니는 이상한 로봇청소기 하나를 가져오던 날, 딸 영희(윤선애 분)는 이제 자주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속내를 꺼낸다. 표면적인 이유는 딸이다. 올해 고3이 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까다롭게 군다는 것. 삑삑거리는 소리가 나면 뒤에 달린 먼지통만 비워주면 된다는 말과 함께다.

첫인상은 영 별로다. 그의 아버지 구영감(이호재 분)은 시끄러운 소리가 성가시고 마뜩잖기만 하다. 딸이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똑똑하지도 않다. 툭하면 혼자 길을 잃고 어딘가에 갇혀 제자리만 맴돌기 일쑤다. 적막한 집안 공기를 깨고, 우연인지도 모르는 움직임으로 마중을 나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랄까. 처음에는 그랬다. 저 차갑고 딱딱한 존재가 처음에는.

임다슬 감독의 영화 <깜빡깜빡>은 이제 치매가 시작된 노인과 구형 로봇 청소기의 만남을 주선한다. 노인을 찾아오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딸마저 이제 곁을 떠나고 그 자리에 남게 된 로봇. 부품조차 찾을 수 없어 다음 생(배터리 교체 이후의 시간)을 장담할 수 없는 구형 로봇 청소기 곁을 지킬 수 있게 된 노인. 두 존재는 마치 하나의 공생 관계처럼 그렇게 서로의 빈자리를 채운다. 치매가 진행되는 동안 노인은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존재를 그렇게 가질 수 있게 된다.

마냥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과 로봇, 얼마 전 개봉해 사랑받았던 영화 <로봇 드림>(2024)의 작은 이야기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이 작품의 이면에는 사실 1인 노인 세대와 돌봄의 부재라는 사회적 문제가 연결돼 있기도 하다. 실제로 올해 실시된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전국 1인 세대수는 모두 1002만 1413개다. 이 중, 60세 이상의 1인 가구 수는 383만 2002개로 약 38%에 해당된다. 결코 적지 않은 수다. 영화 속 이야기가 얼마나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02.
노인의 기억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한다. 교단에 서서 30년이 넘게 가르친 과목의 이론도, 심지어는 매일 드나드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도 떠오르지 않는다. 혼자였다면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 것 뒤꽁무니나 매만져야 했겠지만, 쓸모없을 줄만 알았던 투박한 로봇 하나가 조금씩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온다. 노인은 이제 갓길에 세워진 자동차의 장식을 보며 빈집에서 홀로 분주할 그것을 떠올린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그것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한다. 시끄럽다며 방문을 닫기 일쑤던 날들을 뒤로한 채다.

밥통(쓰레기통)을 비워주며 하나둘 늘어나는 혼잣말도, 깜빡거리는 불빛을 보며 '깜빡이'라는 별명을 지어주는 일도 어쩌면 모두 혼자인 삶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장면이다. 대답은 없을지언정 돌아오지 않는 물음이나마 던질 수 있고, 무엇인가의 이름을 불러 공간의 여백을 잠시 채울 수 있다면 아직 그 삶에는 누군가의 자리가 분명히 놓여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게 아닐까. 노인의 삶에는 이제 분명히 로봇이 자리하게 됐고, 처음 만난 금속의 존재 위에도 인간의 마음이 내려앉는다.
 
 영화 <깜빡깜빡> 스틸컷

영화 <깜빡깜빡>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바보 멍청이가 됐구나. 그래도 말이다. 노망 난 노인네라 말고 우리 깜빡이처럼 그냥 깜빡깜빡하는구나 그렇게들 말해주면 고맙겠구나."

이 영화에는 몇 차례 로봇의 시선으로 비친 장면이 등장한다. 집을 청소하는 청소용 로봇인 만큼 해당 프레임은 바닥과 가까운 상태로 제시된다. 이 시선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분명히 있다. 자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로봇이 놓인 공간은 현재 시점에서 할아버지가 실재하는 공간과 동일하다.

하지만 시선 자체는 노인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청소용 로봇은 인간과 마주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경을 쓸 수 없는 자리에 대신 관심을 가지도록 프로그래밍된다. 다시 말해, 이 시선은 곧 존재의 공백과도 같고 언젠가 이 공간을 떠나게 될 할아버지를, 그가 떠나고 난 뒤에 남겨질 풍경을 암시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말을 거는 할아버지와 존재를 찾을 수 없는 공간에 시선을 두는 로봇(물론 영화 상에서는 두 사람이 감정을 교류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마주하는 장면이 유도되고 있다). 우리는 두 존재가 함께일 때 하나의 장면이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를 여기에서 꺼내볼 수 있다. 이 부분을 현실로 이양하자면 로봇 청소기조차 가지지 못한 노년 세대, 누군가의 돌봄을 기대할 수 없는 부재의 자리가 언제나 공허하고 허전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노년 세대와 돌봄의 문제가 이 시선 속에도 숨겨져 있는 것이다.

04.
구영감이 의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청소용 로봇이라는 대상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영화는 명확히 하고자 한다. 노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고가 제일 먼저 로봇에 의해 포착되고 있는 지점이다. 인지와 사고, 반응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사람과 달리 로봇은 센서에 의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상대가 이 과정의 가장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인지 기능이 떨어지고 심지어 망가지는 과정 속에 놓인 치매 노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언제나 로봇이 한 발 빠르다.

문제는 거기까지라는 것. 생명 구조를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로봇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를 대신해 문을 열어줄 수도 없고, 가스레인지의 전원을 꺼줄 수도 없다. 소리라도 내어 경보를 울릴 수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구형 로봇 청소기에는 그런 기능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 등장했던 노인의 딸 영희를 다시 한번 떠올려야 한다. 그녀가 당분간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통보와 함께 이 로봇 청소기를 두고 떠난 행동에는 무엇이 우선됐을까. 분명히 말하지만,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아버지의 안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깜빡깜빡> 스틸컷

영화 <깜빡깜빡>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5.
영화의 마지막에서 두 존재는 각자의 무엇을 잃는다. 생(生)과 길(路)이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만나 휴머니즘이 형성되는 듯하던 이야기의 마지막. 그 끝자리에 예상하지 못한, 흩날리는 눈발로도 가리지 못할 서늘한 장면이 놓이는 것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존재한다. 우리 모두는 노인이 된다. 지금도 그 모습이 되기 위해 조금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나아가는 중이다. 비로소 살아온 시간과 기억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할 존재가 됐을 때 우리의 곁에는 무엇이 남겨지게 될까.

임다슬 감독은 연출의도에서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인용하고 있다. 존재의 본질과 의미,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어떤 면과 맞닿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다만 내게는 이 영화가 조금 더 무거운 마음으로 다가온다. 영화와 현실, 사람과 로봇, 그리고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을 잇는 각각의 선을 이 작품 속으로 통과시킨 후에는 더욱 그렇게 된다.

몇 번을 돌려본 이후에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만들어주고 불러주는 이름에도 의미는 분명히 남겠지만, 그 의미를 온전히 완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는 일도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남겨진 로봇의 이름이 잠깐의 미소를 짓게 만든다. 할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알지 못했을 '깜빡이'의 진짜 이름이다.
덧붙이는 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아홉 번째 큐레이션인 '이름에게'는 6월 16일부터 6월 30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깜빡깜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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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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