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의 정원사 스틸컷

▲ 무법의 정원사 스틸컷 ⓒ SIEFF


다큐멘터리엔 여러 매력이 있지만, 빼놓을 수 없는 하나는 이제껏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세계를 대면하는 일이다. 알지 못해도 문제 될 것 없던 사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이후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알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아는 것이 되었으므로. 고작 영화 한 편이 일으킨 놀라운 변화다.
 
다큐는 누군가가 다른 무엇을 찍어낸 것이다.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을, 수많은 작고 평범한 것들 가운데서 특별히 제게 의미 있는 어떤 것을 포착해 낸 결과물이다. 누군가의 무엇이 다른 누구의 관심에 닿는 것, 다큐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제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가 '지구를 구하는 거인들' 섹션으로 소개한 작품 <무법의 정원사>가 내게 꼭 그런 영화였다. 이탈리아 영상작가 안젤로 캄바의 83분짜리 장편 다큐로, 이탈리아에서 지난 십수 년간 이어져 온 이른바 '게릴라 가드닝'을 소개하는 작품이다.
 
이탈리아 지역 살리는 게릴라 가드닝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게릴라 가드닝이란 행위를 이 영화로써 처음 접했다. 가드닝이야 조경, 풀이해 정원 손질쯤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 게릴라가 웬말이란 말인가. 게릴라는 전면전을 피하려는 부대의 유격전술이고 비정규 부대의 기습전법으로 쓰이는 군사용어인데 어떻게 가드닝과 같은 소소하고 평화로운 행위와 엮을 수가 있는 건지. 나는 체 게바라가 혁명 중에 골프를 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당혹스런 기분이 됐다.
 
<무법의 정원사>는 이탈리아 전역의 게릴라 가드너를 살핀다. 게릴라 가드너란 말 그대로 게릴라 가드닝을 하는 이들이다. 게릴라 가드닝이란 갑자기 나타나서 식물을 심고 사라지는 행위로, 제 땅이 아닌 곳을 가꾸는 작업이란다. 도대체 왜 제 땅이 아닌 곳에 식물을 심고 가꾸려 드는 것일까.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려 하는 바다.
 
영화가 보이는 게릴라 가드너들은 지역 단위 활동가다. 로마, 타란토, 밀라노, 볼로냐 같은 여러 도시에서 다양한 이들이 일어나 게릴라 가드닝을 한다. 판테 디 피오리, 피안테 볼란티 같은 개인들이 있고, 프리아리엘리 리벨리, 지아르디니에르 소베르시베 로마네, 테라 디 네투노, 아마차 체 피아차 같은 단체들도 있다.
 
무법의 정원사 스틸컷

▲ 무법의 정원사 스틸컷 ⓒ SIEFF

 
꽃을 무기로 체제에 저항한다
 
이들 개인과 단체가 지향하는 바는 제각각이다. 누구는 레즈비언들로 구성된 단체이고, 또 누구는 낙후된 지역사회를 일으키려는 청년들이며, 또 누구는 환경파괴에 경각심을 알리려는 이들이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일어선 이들이 하는 행위는, 그러나 게릴라 가드닝이란 점에서 동일하다. 꽃이 없던 곳에 꽃을 심어내는 것이다.

식물과 꽃을 무기로 정부와 관료들에게 저항하는 것이 이들의 행동강령이다. 버려지고 방치된 터를 치우고 가꾸며 식물을 심어 친환경적 공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이 이들의 목표다. 법적 소유권을 갖는 게 목적이 아니기에 이들이 가꾼 공간이 사라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때로는 공권력이, 때로는 소유자가 나서 이들이 공들인 공간을 쓸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항의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 활동을 이어갈 뿐이다.
 
법적 권리에 도전하는 것도 아니고, 꽃만 심은 뒤 사라질 뿐이다. 잘 되면 사람들이 찾는 공원이며 휴식처가 되고, 잘 안되면 사유지를 무단 침입한 꼴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한 생각이 무색하게 영화 속 활동가들의 활약은 거침이 없다. 계속 무엇을 심고, 거듭 버려진 땅을 가꾼다. 그러다 보면 어떤 땅은 정말이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된다.
 
무법의 정원사 스틸컷

▲ 무법의 정원사 스틸컷 ⓒ SIEFF

 
레아 가로팔로 정원이 생기기까지
 
예를 들면 이런 것. 밀라노 북서부 외곽에 레아 가로팔로 정원(Community Garden Lea Garofalo)이라 이름붙은 도심소공원이 있다. 과거 은드랑게타 마피아 소굴이었던 지역으로, 이 공원 맞은편에 레아 가로팔로라는 여성이 살고 있었다. 레아는 마피아가 장악한 현실에 맞서 지역을 바꾸려 투쟁했다. 강한 저항 끝에 그녀는 검찰 측 증인으로 재판정에 섰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레아의 남편과 마피아들이 그녀를 납치해 살해한 것이다.
 
주차장 후보지로 방치돼 있던 이 땅에 밀라노 활동가들이 수시로 게릴라 가드닝을 벌였고 마침내 시민이 쉴 수 있는 녹지로 땅을 바꾸어 놓기에 이른다. 시민사회의 지지를 받은 활동에 시 당국 또한 마침내 그를 인정했고, 주차장 후보지는 시와 정식 계약을 맺고 공원으로 탈바꿈된다.
 
레아 가로팔로 정원을 만드는 데 공헌한 한 활동가가 말한다. "내일 없어질 건데 뭐하러 애를 써요?"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말이다. 그는 그런 질문들이 너무한 것 같다며, 어쨌든 오늘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데 주목한다고 말한다. 내일 해체될지라도 오늘 변화를 이루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불평하느니 오늘 나가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가치 있다고 말이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포스터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포스터 ⓒ SIEFF

 
연대, 타도, 그리고 혁명의 씨앗을 뿌리는 일
 
다큐를 통해 그와 같은 활동가들을 거듭 만나다 보니 '씨앗을 뿌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는 게릴라 가드너들의 사상이 어떤 기틀 위에 세워져 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된다. 때로는 수확에 대한 기대 없이 씨를 뿌리는 농부가,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전장에 나서는 무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 숭고한 자세가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이다.
 
변화를 도모하는 이탈리아 활동가들로부터 오늘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일 수도 있겠다. 한국엔 '내일 해체될 것'이니 그대로 방치되는 공간이 어마어마하니까 말이다. 재개발과 재건축이란 이름은 도시를 얼마나 빨리 낙후시키는가. 어차피 개발되니까 고치고 가꿀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이 도시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것이다.
 
수많은 재개발 후보지 가운데 빠른 재개발이 이뤄지는 곳은 불과 몇 곳뿐. 일부는 수년, 혹은 수십 년까지 재개발을 기다리며 낙후 되어가는 곳이 적잖다. 사람들은 어차피 떠날 곳, 어차피 해체될 곳이라며 그를 손보지 않는다. 지역은 재개발 후보지로 지정되는 순간 급속히 낡아간다.
 
그와 같은 무력감 앞에서 '오늘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활동가의 태도엔 상당한 시사점이 있다. 당장 오늘을 더 낫게 하고자 애쓰는 동안 지역엔 활기가 돌고 사람들 사이는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대, 타도, 혁명을 외치는 각기 다른 단체의 활동이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특별함을 자아낸다. 씨를 뿌리고 꽃과 식물을 심는 일이 환경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무엇을 바꾸어낸다. 가까이는 버려진 땅의 미관을, 멀게는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꾼다. 그로부터 더 큰 무엇까지 바꾸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레아 가로팔로에게 정원을 바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한국에게 필요한 것도 꼭 그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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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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