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힙, 트렌드를 넘어 문화가 될 수 있을까?

[텍스트힙이 뭔데?] 텍스트힙은 지속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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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achampspd)등록 2024.10.04 18:04

뉴턴을 생각하는 페랑 부인 뉴턴을 생각하는 페랑 부인, 1753 ⓒ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


교양적 포즈, 과시적 교양주의는 오래되었다

'뉴턴을 생각하는 페랑 부인'이라는 그림이 있다. 화가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Maurice-Quentin de La Tour가 1753년경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서 엘리자베스 페랑Élisabeth Ferrand은 책 한 권을 뒤에 두고 포즈를 취한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1687년에 내놓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줄여서 《프린키피아》다. 책이 등장하는 그림은 많지만,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분명히 추정할 수 있는 비교적 드문 경우다.

페랑 부인은 살롱을 운영하며 문예계 인사들, 지식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렇다 해도 페랑 부인이 이 까다로운 수학·물리학·천문학 책을 읽고 그 내용에 관해, 또 제목대로 뉴턴에 관해 생각했을까? 페랑 부인이 라틴어로 쓰인 《프린키피아》를 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령 읽을 수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을 이해했을 가능성 역시 사실상 없다. 다만 페랑 부인이 이를 읽지 않았더라도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는 또 하나의 독서, '책의 메아리를 듣는' 독서일 수 있다.

"책을 읽었다고 하는 경우, 사람들이 독서라는 말을 정확히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에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사실 이 독서라는 말은 아주 상이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반대로, 분명히 읽지 않은 책이라고 해서 그 책들이 우리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책들도 메아리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

거실 한편에 보통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육중한 느낌의 책장, 1960년대부터 이런 책장이 우리나라 중산층 이상 가정의 익숙한 풍경이 됐다. 책장 풍경으로 자기를 돋보이려는 '과시적 교양주의'다. 당시 각종 전집들이 인기를 모은 배경으로, 도시 중산층 가정 거실이나 고위직 사무실의 장식용 수요를 들기도 한다.

고화질 대형 TV가 거실의 왕좌를 차지한 오늘날이다. 어떤 TV가 있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돈이 많다는 것 정도? 그렇다면 차라리 과시적 교양주의가 나은 면도 있지 아니한가. 양주洋酒를 보란 듯 즐비하게 넣어놓은 장식장보다는 하드커버 전집을 정연하게 꽂아둔 책장이 낫지 아니한가.

'뉴턴을 생각하는' 자신을 그려 달라 주문하고 뉴턴의 저서를 옆에 두고 포즈를 취한 페랑 부인. 비록 그것이 자신의 교양 수준을 과시하기 위한 그야말로 포즈에 불과했을지라도 그 '교양적 포즈'를 취하려는 생각이 또 하나의 교양 아닐까. 비록 속물성을 담고 있을지라도 일종의 교양적 커뮤니케이션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서울국제도서전이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

2024년 6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24 서울국제도서전' 관람객이 15만 명을 넘어서며 성황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3년 방문객 13만 명보다 15.4% 늘어난 숫자다. 그런데 문체부가 발표한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은 1년간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의 종합독서율은 43.0%에 그쳤다. 직전 조사 시점인 2021년 대비 4.5%포인트 줄어든 수치로 역대 최저치다.

연령별로 보면 60세 이상 노년층의 종합독서율이 15.7%로 2021년(23.8%)보다 크게 줄어든 반면, 20대(19~29세)는 74.5%로 조사 연령 가운데 가장 높은 독서율을 보였다. 초·중·고교 학생의 종합독서율은 95.8%로, 2021년 대비 4.4%포인트 상승했다. 만화책 보기와 전자책, 웹소설 읽기, 오디오북 듣기 등도 독서에 포함된다는 인식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는 20·30대 여성 및 청년 관람객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이른바 MZ세대를 중심으로 콘텐츠 소비 방식의 변화가 도서전 트렌드에도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평소에는 디지털 환경에서 정보를 파악하고 SNS로 소통하며 온라인 도서 구매와 소비가 이루어지지만 잘 꾸며진 오프라인 공간이나 행사에서 책과 관련 상품을 소비하는 성향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인스타 감성'도 통했다. 독립 부스를 마련한 출판사들이 독창적인 부스 디자인을 선보여 포토존을 방불케 함으로써 청년 관람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텍스트힙이라는 현상

이전 글들에서 살펴봤듯이 텍스트힙이라는 신조어가 회자된다. 대략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 태어난 젊은 세대가 독서와 기록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텍스트힙을 추구하는 이들은 독서를 즐기는 모습을 멋있게 여겨 SNS를 통해 자신이 읽는 책을 소개하거나 독서모임, 필사 등 독서 관련 활동 경험을 공유한다. 책과 독서를 멋진 문화로 인식하는 것이다.

SNS에 자신의 독서 활동을 인증하는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등의 태그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텍스트힙의 대표적 현상이자 증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서 '책스타그램'과 '북스타그램'을 검색하면 각각 613만, 605만여 건에 달하는 게시물이 나온다. 개성 있는 소규모 독립서점을 방문해 책을 구입하거나 필사하는 모습 등을 담은 사진을 SNS에 올리며 자신의 독서 생활을 공유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사실 매우 개인적이고 내밀한 행위다. 그것을 많은 타인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인증하는 것이 일종의 놀이 문화가 된 셈이다. 책을 읽고 기록하는 것에서 나아가 타인이 볼 수 있는 SNS에 독서를 인증하는 행위는 이제 MZ세대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유명 아이돌 르세라핌이나 아이브, 배우 문가영 등 연예인의 독서 생활이 공개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청년 세대의 독서율이나 도서 구매가 크게 증가했을까? 사실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소셜미디어에 책 사진 올리는 사람이 늘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출판계 입장에서는 젊은 층의 책에 대한 관심 증가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2001년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저서 《천 개의 고원》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가격이 5만 원 넘고 책 분량은 1천 페이지에 달했다. 그런데 이 책이 뜻밖에 잘 팔렸다. 실제로 이 책을 읽지는 않지만 일종의 지적知的 허영 내지는 포즈로 책을 사서 갖고 다니는 대학생들이 많았다는 분석이다. 일본의 인문학자이자 작가 우치다 다쓰루의 말이다. "출판은 허虛의 수요 위에 존립한다."

텍스트힙은 지속될 것인가?

읽고 쓰는 행위는 시대에 따라 매체를 달리할지언정 계속될 수밖에 없다. 최근 젊은 세대는 오히려 예전 세대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쓴다. 그것이 종이 신문이나 종이책 같은 전통적 올드미디어가 아니라 온라인, 디지털 소셜미디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스마트폰으로 입력하고 읽는 텍스트 분량을 따지면 예전 세대가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양보다 많을 것이다.

그런 세대가 전통적인 종이책을 읽고 손글씨로 필사하는 것에서 매력을 발견한 결과가 이른바 텍스트힙 현상일지 모른다. 책이라는 물건을 그 내용에서 배워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서 갖고 놀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게 된 변화이기도 하다. 책에 대한 일종의 엄숙주의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텍스트힙 현상은 지속될 수 있을까?

넓은 의미의 출판 생태계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본다. 출판사, 도서관, 서점, 언론 매체 등 책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생태계가 젊은 세대의 취향과 책 소비 성향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 전통적 의미의 책의 품질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세대에 부응해나갈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이다.
덧붙이는 글 글 표정훈 출판평론가.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4년 10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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