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상륙한 미군. 부산시 서구 부민동의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한국 정부가 일본뇌염을 이유로 주한미군의 일본행에 제동을 거는 장면은 이 시점에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정책과 연관시켜 볼만한 사안이다. 이 시기의 이승만 정부는 주한미군의 근무 외 시간을 가급적 한국에 묶어두려 했다. 국민보건상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는 주한미군을 안보를 위한 수단뿐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도 바라봤다. 이들을 부대 밖으로 이끌어내 돈을 쓰게 하자는 것이 이승만 정권의 발상이었다.
5·16 쿠데타 1년 뒤에 교통부가 발간한 <한국 교통연감 1962>는 이승만 집권기와 이 시점의 한국 관광산업과 관련해 "주한UN군의 관광객화를 위한 입지적 호조건을 구비한 현실에 적응해야 할 것이 무엇보다도 앞선 과제"라고 평가했다. 잠재적 관광객인 주한미군을 대거 확보하고 있는 한국의 유리한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군사정권 초기뿐 아니라 이승만 집권기에도 국가적 과제였다는 언급이다.
그런데 위 신문 기사들에 나타나는 것처럼, 미군 군인들은 틈만 나면 한국 밖으로 휴가를 나갔다. 위 교통연감은 "종래 일본·홍콩 등지로 휴가를 즐기던 UN군"이라는 말로써 그들의 주된 여행지를 소개한다.
미군들이 일본 등을 선호한 것은 주한미군 당국이 한국의 관광 여건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2014년에 <한국사회학> 제48집 제1호에 실린 박정미 한양대 연구교수의 논문 '발전과 섹스 – 한국 정부의 성매매관광정책, 1955~1988년'은 한국관광협회의 <한국관광발전사>를 근거로 "미군 당국은 관광시설 미비와 보안 등의 이유로 한국에 미군을 위한 휴식과 오락시설의 설치를 보류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들은 주로 일본이나 홍콩으로 휴가여행을 떠났다"라고 설명한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군을 묶어두기 위한 적극적 행동에 나섰다.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인 이나영 중앙대 교수가 2007년에 <한국여성학> 제23권 제4호에 기고한 '기지촌의 공고화 과정에 관한 연구(1950~60)'는 "1950년대 초반 당시 주한미군들은 5일간의 휴가기간 중 일본으로 날아가 성매매업소를 전전하곤 하였다"고 한 뒤 이들을 사실상 국내 관광객으로 유치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방침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부는 미군부대 주변의 댄스홀과 바 등을 내국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하고 미 헌병대에 구역통제권을 부여함으로써 미군이 한국 국민의 간섭을 받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성적 위안을 받도록 배려하기 시작했다. 또한 포주들은 창녀들을 등록시키고 미군 지휘부와 직접 교섭하기 위하여 위안부자치대를 조직하였다."
일본뇌염을 옮겨올 수 있으니 미군의 일본 여행을 제한해달라는 이승만 정부의 요청은 이런 시기에 나왔다.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노력은 다음과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위 논문의 기술이다.
"1957년 이후 일련의 정부 정책으로 인해 양공주들의 구획화와 격리, 효율적 감시 체계가 가능해지고 성병 진료소가 미군기지 주변으로 집중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자국 병사들의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판단한 미국 당국은 같은 해 미군의 외출과 외박을 허용한다."
"한국 정부는 미군의 일본행 성매매 수요를 보다 효과적으로 국내로 돌리기 위한 방안으로, 위안부들을 상대로 계몽 강연회를 열었다. 각 지역의 경찰 간부들이 직접 개입하여 조직하고 관리·실행하는 형태였는데, 주 내용은 성병 예방 및 미군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의 고양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성들 기지촌으로 내몰아... 이승만에게 책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