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한 뒤 물을 마시고 있다.
유성호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의 24일 발언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날 그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과거 동대구역을 박정희역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KBS 본관을 박정희센터로 바꾸자는 말에 "멋진 생각"이라며 동조한 것에 대해 '극우 성향이 보인다'는 야당의 지적을 받았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극우라는 규정이야말로 대단히 위험하고 나에 대한 인신모독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이야기하면 극우가 되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하면 세련된 지식인처럼 취급받는 부분은 아주 불공정하다"고 답했다.
김대중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겪었던 고난
이 발언 중에서 '김대중을 존경한다고 하면 세련된 지식인처럼 취급받는다'는 부분은 과거에 흔했던 '김대중 빨갱이론'이 지금은 얼마나 많이 힘을 잃었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거나 김대중을 '선생님'으로 부르면 빨갱이 혐의를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 아주 먼 옛날이 아니다. 김대중에 대해 호의적 시각을 드러내면, 사상을 의심받지 않더라도 '고향'을 해명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12.16)를 코앞에 둔 그해 12월 7일,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평민당)의 이중재 선거대책본부장이 집권 민주정의당(민정당)의 부정선거 사례를 발표했다. 그날 발행된 <동아일보> 톱기사는 발표 내용을 소개하면서 "지난 4일 모 비행부대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부재자투표를 하던 중 기호 1번만을 찍으라는 강요를 받았으며 이를 거부한 4명이 구타당했다"고 한 뒤 이렇게 전했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모 부대에서 5일 부재자투표를 실시하던 중, 상관이 '김대중 후보에게 표를 찍는 사람은 용공분자로 판단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했다."
1992년 대선(12.18)을 열흘 앞두고 한겨레신문사 대전지사에서 충남북·대전 대선 토론회가 열렸다. 그달 10일 자 <한겨레> 12면 특집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안원종 충남 연기군 영농후계자연합회장은 지역민들이 김대중의 집권 가능성을 언급하는 모습을 놀라운 현상으로 평가했다. 그의 말은 이렇다.
"김대중 후보의 정책이나 집권 가능성을 각종 모임에서 자유롭게 개진하는 등 인식도 놀랍도록 달라지고 있죠. 지난 13대 대선 때 우리 지역에서 김 후보에 대한 지지 발언을 하면 함께 빨갱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이 '뉴DJ 플랜'을 표방하며 '우향우'를 하던 1990년대 후반에도 그를 빨갱이로 대하는 분위기는 적지 않았다. 1997년 대선을 5개월 앞둔 그해 7월 4일 보수단체인 한국발전연구원을 방문한 김대중이 그곳에서 받은 황당한 질문은 이때도 그를 색깔론으로 엮는 시선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한국발전연구원의 김대중 초청 강연을 보도한 그달 5일 자 <경향신문> 5면 하단은 "안무혁 전 안기부장이 원장으로 있는 이 연구원은 전직 장성 및 정보기관 간부 출신들을 중심으로 80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고 한 뒤 질의응답 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한 질문자는 '항간에는 북한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는 김 총재가 대통령이 돼선 안 된다는 말이 있다'며 '차제에 김정일이 퇴진하도록 요구할 생각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김대중이 김정일 퇴진을 요구할 만한 입장에 있음을 전제로 하는 질문이었다. 전직 장성 및 정보기관 출신들의 모임에서 나온 발언이다. 질문자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질문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식의 비판이 아직은 용인되던 1990년대 후반의 풍경을 여기서 목격할 수 있다.
질문을 가장한 그 같은 비판에 대해 김대중은 특유의 여유로 대응했다. "김 총재는 '이 같은 어려운 질문은 처음'이라며 엄살을 떨기도 했지만 시종 여유 있게 받아 넘겼다"고 위 신문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