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6월 7일 자 <동아일보> 기사 "남한에 살아있는 소월의 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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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못 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을 남긴 시인 김소월(1902~1934)의 위상은 이승만 집권기인 1950년대 남한에서도 대단했다. 평북 출신인 그는 3·1운동 직후에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잠시 다녔을 뿐, 남한과는 인연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1955년 9월 29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것처럼 자유문학협회가 주관하는 김소월 추모 행사가 남한 땅에서 성대히 열렸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이 팔린 문학작품은 그의 시집이다.
김소월은 사후에 남한에서 환대를 받았지만, 그의 혈육이 이 땅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를 거북스러워할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다름 아닌 저작권 문제 때문이었다. 1959년 6월 7일 자 <동아일보>는 "수많은 출판사들에 의하여 20여 종"의 김소월 시집이 판매되고 있다고 알려준다. 휴전선이 저작권에 대한 고민을 없애줬다.
출판사들이 걱정할 만한 사건이 1959년 발생했다. 북에 있어야 할 김소월의 아들이 남한에 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알고 보니 아들뿐 아니라 누이를 포함해 최소 다섯 명의 친척이 부산과 서울에 정착해 있었다. 이런 소식을 담은 기사의 제목은 "남한에 살아 있는 소월의 영식"이다. 출판계를 긴장시키는 뉴스였다.
김소월의 아들 김정호의 출현은 상당한 액수의 저작권과 맞물리는 사안이었다. 20대 후반의 김정호는 그런 이미지와 상반되는 집에 살고 있었다. 위 기사는 그가 서울 용산 교통부 관사 옆 판잣집에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소월의 할아버지는 대지주이자 광산업자였다. 김소월이 문학과가 아닌 도쿄대 상대 예비과에 들어간 것은 경영학을 배워 가업을 잇기 위해서였다. 그가 시를 쓰면서 24세 때 평북 구성군에 동아일보사 지국을 차리고 뒤이어 사채업에 손을 댄 것은 집에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판에는 사채업마저 잘되지 않아 가세가 크게 기울면서 '돈타령'이란 김소월의 시에 "있을 때는 몰랐더니 없어지니까 네로구나"라는 한탄이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본래 부유했던 이 가문의 자손이 머지않아 서울에서 판잣집 생활을 하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연탄가스에 취약한 판잣집
이승만 집권기에는 판자촌이 서울의 풍경을 이뤘다. 사대문 안을 동서로 흐르는 청계천 주변과 인왕산·낙산·남산 기슭 같은 곳에 대규모 판자촌이 형성됐다. 영등포 공업단지(영단) 주변을 지나는 안양천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빈민촌으로 분류되는 이 지역 주민들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가운데 1950년대 서울이 작동했다.
김정호를 비롯한 주민들은 자기 대에 처음으로 판잣집에 살게 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느끼는 불편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판잣집에는 화장실이 없었고 전기는 물론 수도도 마찬가지였다. 석유 등잔에 불을 켜고 공중수도에서 물을 길어오는 게 일상이었다. 물통을 들고 공중수도 앞에 줄을 서는 일은 어린아이의 몫이었다. 주변에 포장도로도 없었기 때문에 비만 오면 집안에 진흙이 잔뜩 들어왔다. 부엌이 따로 없어 집 바깥에 솥을 놓고 요리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화재의 위험도 높았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판자촌 전체로 불이 번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불이 잘 번지기도 했고 잘 일어나기도 했다. 1959년 2월 22일 자 <동아일보>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 주민이 같은 동네 판잣집 앞에 아직 덜 꺼진 연탄재를 버리고 가는 바람에 이 집이 불에 탔다고 보도했다.
화재만큼 위험한 것은 1970년대까지 만연한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나무를 잇댄 벽에 틈이 많았기에 판잣집에서는 가스중독 사고가 빈발했다. 그래서 화재가 아닌 다른 이유로 판잣집 일가족이 한꺼번에 사망하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간주되기 쉬웠다.
1959년 10월 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일가족 중 3명은 희생되고 2명은 위독한 부산시 수정동 산비탈 판잣집 화재의 원인과 관련해 의사는 DDT 살충제 복용을 지목한 반면, 경찰은 연탄가스 중독을 지목했다. 경찰은 방바닥에 구멍이 2개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중태에 빠진 가족들을 진찰한 의사의 소견이 더 정확하겠지만, 경찰의 판단은 '판잣집은 틈이 많아 연탄가스에 취약하다'는 당시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들어갔다가 유엔군 포로가 되어 남한에 정착한 김정호는 이런 판잣집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그가 용산 교통부 관사 옆에 입주한 것은 남한에서 만난 당고모(아버지의 사촌) 부부의 도움으로 교통부 자재국 경비원이 됐기 때문이다.
1959년 6월 보도된 '남한에 살아 있는 소월의 영식' 기사는 판잣집 탈출의 신호탄이 됐다. 보도가 나간 후 그의 용산 판잣집은 옆에 있는 교통부 청사보다 더 중요한 장소가 됐다. 그해 9월 6일 <동아일보>는 "서울 시내 용산구 교통부 입구에 있는 항공대학 뒤 김정호(28=소월의 3남) 씨 집의 단간방에는 20여 명의 출판업자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들었다"라며 "그들은 저마다 소월시집의 출판독점계약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이승만 집권기부터 판잣집이 많아진 것과 관련해 흔히 한국전쟁을 떠올리기 쉽다. 이 전쟁이 판잣집 증설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었다. 1951년에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훗날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등을 거쳐 서울시립대 교수로 은퇴한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제1권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에 서울 주택은 19만 1260호였다.
전쟁이 거의 끝날 즈음인 1953년 3월 31일, 완전히 불타거나 부서진 서울 주택은 3만 4742호, 부분적으로 불타거나 부서진 집은 2만 340호였다. 상당히 많은 집이 파손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주택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판잣집 폭증의 원인을 한국전쟁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미국의 원조경제와 이승만의 농업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