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군 득량역 인근 추억의 거리에 옛날 다방을 재현해놓은 모습.
연합뉴스
미국과 중국의 외교관계 수립, 미국과 대만의 단교로 시작된 1979년 한 해는 국내외적으로 온갖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커피 이야기가 신문의 지면이나 방송 시간에 끼어들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연초부터 이란의 이슬람혁명 소식이 전해졌고, 이것은 제2차 오일쇼크를 불러왔다. 봄이 되자 '재계의 신데렐라'라 불리면서 성장하던 율산그룹이 도산했고, 무역회사 YH의 공장 폐쇄와 공장 노동자 5백 명 해고가 초래한 'YH사건'이 연일 언론을 뜨겁게 했다. 취중에 정부를 비판한 시인이 구속되고, 독서량 제한에 항의하던 긴급조치 위반 대학생들에게 교도관들이 집단폭행을 가했다. 또한 숨어서 활동하던 간첩을 검거했다는 소식 등 때만 되면 등장하는 우울한 소식들도 끊이지 않았다.
세상은 혼란하였어도 국회의원들은 안일하고 한가했다. 유신정우회, 이른바 유정회라고 부르던 전국구 국회의원 모임은 1979년 10월 22일 간부회의에서 그동안 유지해 오던 '커피타임'을 존속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공화당도 부러워하는 제도이니 유지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런 혼란은 김영삼 야당대표의 국회의원 제명, 부산과 마산 지역 대학생과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와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이어졌고, 결국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현직 대통령 박정희 저격 사건이 벌어졌다. 김재규의 선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프랑스에서 실종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진 지 20일째 되는 날이었다. 박정희의 사망 이후 그를 회고하는 기사들이 넘쳐났는데, 그가 청와대를 방문한 손님들의 커피에 설탕을 직접 쳐주고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는 미담은 빠지지 않았다.
'커피 자판기' 유행한 1979년
한반도 밖에서의 변화도 태풍급이었다. 1960년대의 민권운동과 진보적 시민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주의가 급격히 세력을 얻었다. 보수주의자 마거릿 대처가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리로 취임하였고,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영화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이 공화당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이런 변화의 해 1979년은 정작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에서는 큰 변화나 뉴스가 없었던 매우 조용한 1년이었다. 제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원두 등 수입 원자재 값이 상승하였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물자 절약 운동이 거세게 벌어졌다. 국산 차를 마시자는 애국적 운동 속에 공직 사회를 중심으로 커피를 기피하는 풍조가 부분적으로 나타났다.
모든 다방은 5종 이상의 국산 차를 메뉴에 올리라는 정부의 지시와 단속이 이어졌고, 국산 차가 매우 인기 있다는 언론의 친정부적 보도도 이어졌다. 커피 가격 인상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던 당시 인공커피 개발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의 제너럴 푸드, 스위스의 네슬레 등 세계적인 커피 제조업자들이 천연커피와 맛과 향이 비슷한 수준의 인공커피 제조에 성공하였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7월 20일 자 <동아일보>가 전하였다.
물가 상승으로 인한 소비 둔화 속에서 이해 들어 커피자동판매기가 일대 유행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보급 초기에 보였던 잦은 기계 고장으로 사용을 경계하던 소비자들의 심리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동전은 삼키고 커피가 없는 뜨거운 물만 쏟아내는 일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로 인해 기계 자체를 기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급이 시작된 지 1년 정도 경과한 1979년 11월 당시 전국의 커피자동판매기는 4000여 대로, 서울 시내 다방 수 3640개를 넘어섰다. 삼성전자, 롯데산업, 동양정밀, 화신전기 등 4개 회사에 이어 금성사도 이해 말 커피자동판매기 제작과 판매에 뛰어들었다.
고등학교, 중학교에 이어 초등학교 구내에 커피자동판매기가 설치되었다는 우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 M초등학교 지하 매점 앞에 설치된 자동판매기에서 밀크커피를 마시는 어린이들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신문(조선일보, 1979년 11월 28일 자)에 실려 우려를 자아냈다. 부산에 있는 A국민학교의 박모 교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커피자동판매기가 학교 앞에 설치되고부터는 학생들의 저축 실적이 떨어졌다고 개탄하였다.
자동판매기 커피의 인기와 원자재 가격 상승이 합해져 자동판매기 커피 1잔 가격이 100원에서 120원으로 일제히 인상된 것이 이해 11월 10일이었다. 심각해지는 인력 부족 현상이 자동판매기의 유행을 가속화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나타났다. 오토메이션(자동화) 시대에 대한 우려였다.
1970년대 후반에 벌어졌던 흥미로운 사회현상 중 하나는 영수증 주고받기 생활화 운동이다. 1977년 7월에 시작된 부가가치세의 정착을 위해서 정부 주도로 벌인 운동이었다. 모든 업소에는 영수증 발행과 금전등록기 설치가 요구되었고, 소비자들에게는 영수증을 받을 것과 받은 영수증을 모아서 보상금 받을 것이 권장되었다.
영수증 주고받기는 국세청의 역점 사업이었다. 이 운동의 대상 업종 중 대표적인 것이 다방이었다.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받은 영수증을 제출하면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커피 한잔을 마신 영수증을 세무서에 제시하면 1원 30전의 보상금을 받았다. 해오던 관습대로 세금을 덜 내기 위해 영수증 발급을 기피하던 다방들은 단속 대상이 되었다.
서울 중구 명동의 새마을부녀회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1977년 7월이었다. 이 모임은 이후 25개월간 지역 다방의 고객들이 버리고 간 영수증을 모아 국세청으로부터 무려 8506만 550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이 돈으로 명동 일대 직업 청소년을 위한 복지회관 건립을 시작하였다. 이 훈훈한 소식은 '커피 한잔의 영수증 모아 불우소년 복지회관 건립'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1979년 8월 17일 자에 크게 보도되었다.
다방이 줄어드는 기이한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