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김두봉이 편찬한 문법책 <조선말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처음 얼마간 임시정부와 함께했던 김두봉은 나중에는 임정을 멀리했다. 위 논문은 "임정 소재지 상해 그리고 중경에서 거의 20년을 살았지만 임정 근처에 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시절 그는 독립운동진영의 아웃사이더 비슷했다.
그러면서 공부에만 매진했던 그가 1930년대에 약산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의 주요 인물이 되고 1942년에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 됐다. 그러더니 해방 뒤에는 스탈린의 지원 같은 것 없이도 김일성과 거의 비슷한 위상을 차지했다. 1948년에 김구와 김규식이 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에 가서 벌인 남북협상이 4김 회담이 된 것은 북측 상대방이 김두봉과 김일성이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부근에 있을 때만 해도 아웃사이더로 비쳐졌다. 마흔이 다 되도록 지도자와는 거리가 먼 골샌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랬던 이가 지도자로 급부상하더니 해방 뒤에는 4김 회담의 주역이 됐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과 자신의 항일투쟁을 기반으로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제자라는 후광과 자신의 항일투쟁을 기반으로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주시경의 후광을 배경으로 김일성과 거의 비슷해졌다는 것은 김두봉이 실제로는 아웃사이더 체질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지도자 기질이 없었던 사람이 마흔 넘어 갑자기 지도자 스타일로 바뀌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동안 그가 아웃사이더로 비쳐졌던 것은 그 시절 그의 주변에 있었던 이들의 독립운동이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원봉 스타일의 독립운동이 '골샌님'의 체질에 더 맞았다고 봐야 이치에 맞다.
결과적으로 '골샌님'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중에도 골샌님처럼 한글 연구에 매진했다. 그런 뒤 해방 이후의 북한에서 한글운동의 지도자가 됐다. 위의 이준식 논문은 "주시경의 후계자, 독립동맹 주석 출신, 여기에 북한 정권의 2인자라는 위상이 더해시면서 김두봉은 자연스럽게 북한 언어정책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 뒤 "김두봉이 2인자로 있는 동안 김일성은 언어정책과 관련해 별도의 교시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문자정책에 관한 한 김두봉이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동문 최현배는 해방 뒤 미군정청 편수국장과 대한민국정부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어 한글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시기에 김두봉도 북한 국가권력을 활용해 한글운동을 벌였다. 문자 정책에 관한 한 주시경의 제자들이 남북을 다 석권한 셈이다. 김두봉이 고향 후배 최현배를 이끌고 주시경을 찾아가는 장면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얼마나 소중한 장면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남북으로 분단된 결과, 남과 북은 똑같이 한글 전용에 성공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래 한글이 가장 막강해진 것은 이때였다. 해방과 함께 민족이 분단되고 외국 군대들이 주둔하고 이남에서 친일파가 더 강해지는 상황에서도 유독 한글만큼은 진정한 해방을 맞이했다고 평해도 될 것이다.
이런 성과를 거두는 데 기여한 김두봉은 대한민국 국가보훈부가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하지만 세종대왕과 주시경 선생이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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