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19 10:15최종 업데이트 24.06.1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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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강의에서 종종 다루는 주제가 SF(Science Fiction)이다. 예전에는 공상과학 문학이라고 번역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SF는 공상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과학기술, 혹은 사유의 의미와 한계를 토대로 앞으로 펼쳐질 인류문명의 미래를 보여준다. 사유실험을 시도하는 장이 SF이다.

그러므로 어떤 SF 작품이 예측한 내용이 실제 현실에서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건 별무소득이다. 필요한 건 비인간의 시각에 기대 SF가 어떻게 인간과 인간 문명을 돌아보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최근 개봉한 두 편의 SF 영화를 봤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퓨리오사)와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새로운 시대)다.


영화평론가가 아닌 나로서는 이 영화들이 한 편의 작품으로서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를 영화미학의 시각에서 온당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좋은 SF 문학과 영화가 그렇듯이, 이들 영화는 영화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인류의 삶을 숙고하게 한다. 

영화 장면에서 떠오르는 우리 사회의 모습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스틸 이미지.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전에 인상 깊게 본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이후 9년 만에 만들어진 <퓨리오사>는 노골적으로 우리 시대를 상기시킨다. 영화는 전력망 붕괴, 폭염과 팬데믹, 화폐 가치의 하락 등을 도입부에서 언급하며, 인류문명의 종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알려준다. <퓨리오사>는 그 종말이 무엇 때문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지는 않지만, <새로운 시대>는 그 이유가 통제되지 않는 인류의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이 낳은 파국적 바이러스라고 알려준다. 모두 인류가 궁극적인 책임자이다. 남 탓할 게 아니라는 뜻이다.

두 영화는 모두 물, 에너지 자원, 식량 등을 얻기가 매우 힘들어진 파멸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역시 디스토피아는 SF 문학이나 영화의 패턴이다. 물질적 생존이 위협받게 되면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 가장 뛰어난 정치 제도라는 민주주의도 위험에 처한다는 건 이미 인류 역사가 보여줬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히틀러의 등장과 몰락이 좋은 사례이다.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히틀러는 독재로 집권하고 통치한 게 아니다. 1차대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처한 대혼란 때문에 대중은 민주주의를 사치라고 여기게 됐다. 그 틈새에서 히틀러 같은 선동가가 출현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하는 모습이다. 

굳이 복잡한 정치이론에 기대지 않더라도, 물질적 여유가 없으면 정신적 여유도 없다. <퓨리오사>가 보여주는 끔찍한 세상의 모습은 그 점을 확인한다. 영화의 작중 배경은 문명 붕괴 후 45년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은 정치의 토대가 무너졌을 때 등장하는 군사집단, 군벌(warlord)이다. 역시 낯익은 모습이다.

<분노의 도로>에서 악의 근원으로 등장했던 임모탄 조(러치 험)가 자원통제를 무기로 다스리는 시타델, <퓨리오사>에서 새롭게 등장한 바이커 군단의 지도자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 그 밖에도 몇 개의 강력한 군벌이 세상을 다스린다. 다스린다기보다는 압도적 힘으로 지배한다. 민주주의는 종말을 맞았다. 힘만이 통한다. 나도 그렇고 많은 관객이 흥미롭게 본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의 전투 장면은 뛰어나지만, 그런 액션의 감흥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문명 붕괴의 어두움을 가리지 못한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래 폭풍은 묵시론적 분위기를 표현한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남는 건 짐승의 논리다. 무장력과 자원을 독점하는 소수의 상위 지배 집단이 등장하고, 거기 속하지 않는 집단은 살아남기 위해 복종하고 짐승처럼 생활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생존이 문명보다 먼저다. 생존이 위협받으면 문명은 불가능하다. <퓨리오사>는 그런 계급의 구별과 격차를 보여준다. 시타델의 상층에 거주하는 지배자들과 달리 시타델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의 생활을 영화는 외면하지 않는다.

이들은 집도 없이 땅굴을 파고 햇빛 가리개와 넝마가 된 천을 걸치고 산다. 군벌의 폭력을 피해 굴을 파서 숨고 생활한다. 영화 뒷부분에 나오는 충격적인 장면은, 이들이 인간 시체를 이용해 구더기를 키워 먹거나 심지어 인육을 먹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장면은 문명이 붕괴한 후 벌어지는 극단적 상황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냥 현실성이 없는 장면일까? 이런 장면에서 우리 시대의 심화하는 계급의 분리, 몫 없는 자들의 소외, 부의 집중과 그에 따른 양극화를 떠올리게 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퓨리오사>는 유토피아의 이미지에 가까운 녹색의 땅에 살던 어린 퓨리오사(애니아 테일러조이/알릴라 브라운)의 영웅 성장기를 조명하면서, 그런 영웅이 어떻게 저항의 구심이 되는지를 화려한 롱테이크 추격과 전투 씬으로 보여준다. 조지 밀러 감독의 장기는 그런 장면에서 발휘된다. 퓨리오사의 저항이 어떤 결실을 낳는지는 9년 전에 나온 <분노의 도로>가 보여준다. 어떤 강고한 압제도 결국은 저항을 말살하지는 못한다. 그 저항에는 퓨리오사 같은 구심이 필요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풀이 확인해주며, 영화는 대리만족을 주는 역할을 한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스틸 이미지.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새로운 시대>는 압제에 맞서는 저항의 가능성을 더욱 선명하게 제시한다. 짐승의 수준으로 추락한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쨌든 <퓨리오사>는 인간의 이야기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인간 대 비인간의 관계를 더 명확하게 서사의 축으로 삼으며, 인간 외부의 시각에서 인류와 인류문명을 바라본다. 거기서 생기는 힘이 있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인간에 가장 가까운 종인 유인원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인류가 만들어낸 바이러스의 확산 때문에 지능을 갖고 지배종의 위치에 올라가는 유인원과 반대로 언어와 지능을 상실해 가는 인류를 대조해서 보여준다. 한때는 인류가 다른 종을 사냥하고 길들였다. 이제는 유인원이 인류를 그렇게 대한다. 종의 역전이다. 

새로운 지배종의 위치에 오른 유인원은 인류 역사가 그랬듯이 탁월한 지도자인 시저(앤디 서키스)의 리더십을 따른다. 시저의 이름이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가이자 전략가 중 한 명이었던 줄리어스 시저 혹은 카이사르를 가져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난다. 인류는 다양한 정치 체제를 실험해왔지만, 단 한 번도 지도자가 없는 정치 체제는 가져본 적이 없다는 구절. 나는 그 지적에 공감한다.

<혹성탈출> 3부작의 매력도 지도자로서 시저의 성장기가 지닌 힘에서 발생한다. 3부작이 종료된 지 7년 만에 돌아온 <새로운 시대>는 퓨리오사의 과거 삶으로 거슬러 올라갔던 <퓨리오사>와는 반대로 탁월한 지도자 시저가 사망한 후 몇 세대가 흐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인류 역사에서 줄리어스 시저/카이사르가 신화 같은 존재가 되었듯이, 유인원 지도자 시저도 그런 존재로 우상화된다.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시저의 유산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그런 해석의 동력은 더 강고한 지배체제를 만들려는 욕망이다. 인류 역사에서 숱하게 발견하는 모습이다.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은 시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란 독수리 유인원 집단에 속한 노아(오웬 티그)이고, 영화의 골격은 노아가 유인원 제국을 세우려는 선동가이자 독재자인 프록시무스(케빈 두런드) 일당에게 끌려간 부족을 되찾으려는 투쟁이다. 그 과정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주목한 캐릭터는 프록시무스다. 프록시무스는 우리 시대에 여기저기서 관측되는, 민주주의의 정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출된 지도자들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프록시무스는 히틀러가 그랬듯이 교활한 선동가다.

프록시무스는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는 시저의 유산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대중을 설득한다. 대중은 공포와 생존의 위협 속에서 그 설득에 넘어간다. 반복되는 선전 선동의 효과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파괴된 인류문명이 남긴 기술과 정보를 비밀리에 독점하려는 프록시무스의 책략도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권력과 과학기술, 권력과 지식은 그렇게 연결된다. 

그에 맞춤하게 <새로운 시대>에는 살아남으려고 프록시무스에게 부역하는 인간 지식인의 모습이 희화화되어 그려진다. 그렇다면 이런 선동가, 독재자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퓨리오사>가 제기했던 똑같은 질문을 <새로운 시대>도 제기한다. 영화 전체로 볼 때는 뛰어나다고 하기는 힘든 이 영화가 지닌 힘이 여기 있다. 영화의 결말을 맺는, 강고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평범한 유인원의 연대가 그것이다.  

이렇게 적으면 뻔한 결말이라고 할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는 많은 허점이 있지만, 아직 그것을 대체할 만한 정치 체제를 찾지 못한, 민중(demos)의 통치(kratos)만을 유일한 원리로 한다. 민중이 통치한다는 말은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지만, 민중의 통치를 위배하는 모든 위임된 권력은 언제든지 민중의 저항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새로운 시대>는 꽤 힘차게 보여준다. 

강력한 힘과 권위를 과시하는 프록시무스에게 겁을 먹었으나 노아의 저항에서 시작되어 독수리 부족 전체의 저항으로 확산하는 과정은 모든 저항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거대한 들판을 불태우는 것도 그 처음은 미약한 불씨였다. 나는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지지한다.

한국 사회는 불과 몇 년 전에 이런 저항의 불씨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그것이 단지 영화에 나오는 허구만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강렬하게 체험했다. 한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때로 SF영화는 먼 미래의 허구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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