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17 13:47최종 업데이트 24.06.17 18:11
  • 본문듣기

지난 1월 17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윌턴 매너스 시청 인근 저스틴 플리펜 공원 기둥에 LGBTQ+ 프라이드 깃발과 트랜스젠더 프라이드 깃발이 걸려 있다. ⓒ 연합뉴스


2023년은 미국 플로리다주의 트랜스젠더들에게 절망적인 시기였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을 위한 성별 재지정 의료 행위가 금지되는 법안과 규정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성인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전환)에 대해서도 의료 기금 지원을 삭감하는 등의 제한이 가해졌다.

성별 재지정 의료 행위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과 출생 시 지정된 성별이 다른 이유로 발생하는 트랜스젠더의 성별 위화감을 줄이는 데 매우 필요하다.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일은 트랜스젠더들에게 고통 속에서 살아가라는 것과 다름없다. 이에 트랜스젠더와 이들의 부모 그리고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이 함께 이러한 법률과 규정의 정당성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11일 이 소송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미국 플로리다 북부 연방지방법원의 로버트 힌클 판사는 청소년과 성인 트랜스젠더의 성별 재지정 의료행위를 금지하거나 제한한 일련의 플로리다주 법률과 규정의 시행을 가로막고 그것이 위헌이라 선언했다. 누군가를 단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힌클 판사는 개인이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반대하는 신념을 가지는 것에까지 사법이 개입할 수는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남겼지만 동시에 누군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행위는 결코 자유의 영역에 둘 수 없다고 판결했다. 아울러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도 남겼다.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105장에 달하는 힌클 판사의 판결문에는 트랜스젠더 차별과 혐오에 대응하는 모범 답변이 담겨 있다. 판결문에는 트랜스젠더가 겪는 성별 위화감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과 정신 건강 측면에서도 의료적 트랜지션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성별 재지정 의료 행위를 완전히 금지하는 것이 얼마나 비과학적인 일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힌클 판사는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해 필요한 규제는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예시로 '성별 재지정 의료 행위가 당사자 개인의 성별 정체성을 지지하는 것과 무관한 영역에서 사용된 경우'를 들었다. 즉 의료적 트랜지션을 규제하는 건, 그 치료가 본래의 목표에서 벗어나 행해지는 때 정도라는 것이다.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힌클 판사는 판결문에서 플로리다주에 도입된 일련의 금지와 제한 조치가 '트랜스젠더를 향한 적개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플로리다주지사이자 위헌 판정을 받은 트랜스젠더 차별 규정을 실질적으로 선동한 극우 정치인 론 디샌티스를 비롯해 플로리다의 많은 정치인들은 이 말에 발끈할 것이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의료 행위'와 '성인이 되어 후회할 가능성'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도입한 것이라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소아과학회와 미국심리학회 그리고 미국의학협회가 청소년 트랜스젠더의 성별 재지정 의료행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점에서 이런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말이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연방법원 판사가 트랜스젠더 아동에 대한 의료 서비스 제한을 위헌으로 판결한 다음 날,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주지사가 주 예산안에 서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트랜스젠더 차별 주장한 정치인들의 침묵

이에 미리 답을 하듯 힌클 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소년 트랜스젠더의 성별 재지정 의료 행위를 금지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는 동안 심지어 정치인들 사이에서 트랜스젠더 혐오 발언이 나왔을 때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사람들은 왜 아무도 나서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플로리다주 의회의 한 정치인은 의료적 트랜지션을 '의사들이 아이들의 신체 부위를 잘라 쓰레기통에 던지는 행위'라고 비하하기까지 했다. 미국판 '사이버 렉카'라고 할 극우 유튜버들도 트랜스젠더를 비정상으로 치부하는 온갖 발언을 쏟아냈다. 힌클 판사의 질문은 간단하다. 정작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사람이 무엇을 했냐는 것이다.

판결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과 같은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느냐고. 왜 같은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근거로 트랜스젠더를 멸시하는 발언을 했을 때 이들을 소환하여 무엇이 문제인지 따져 묻지 않았느냐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긴 하다. 가령 무역 규제에 찬성하더라도 누군가 그 근거로 외국인 혐오를 가지고 온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며 이를 비판하거나 거리를 두고자 할 것이다. 혐오를 이유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힌클 판사가 지적했듯 플로리다주 정치인들은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에 침묵했다. 그 발언을 한 사람들과 같은 주장을 하면서 말이다.

사실 판결문을 통해 비판된 모순은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성소수자 혐오집단은 성소수자에 대한 가짜뉴스를 유포하거나 노골적인 혐오를 전시하고 심지어 이를 퀴어퍼레이드와 같은 행사에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들은 성소수자를 사랑하기에 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일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비슷하게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교육을 막거나 성소수자에 대한 정보를 담은 책을 도서관에서 퇴출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하고 사회의 그늘로 몰아가는 일이 사랑하는 것과 함께 갈 수 있을까. 힌클 판사가 비판한 정치인들의 침묵이 여기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적인 성소수자 혐오 집단만 차별과 멸시를 전파하는 게 아니다. 때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성소수자 혐오나 다름없는 주장을 하고는 한다.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혹은 아끼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하지만 그럴 때 자신이 상대를 정말 보호하고 아끼는 게 맞는지 동기를 다시 질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로버트 힌클 판사가 판결문에 남긴 문장으로 글을 닫고자 한다.

"시간이 지나며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가 줄어든 것처럼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도 줄어들 것이다. 예전 시민권 운동가의 말을 빌리자면, 윤리적 세계의 궤적은 길지만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